재학중이던 때, 그 때도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였는데 국문학과였으므로 좋은 책을 추천하는 메뉴도 있었다. 처음 그 콘텐츠를 채우기 시작할 때 마침 MBC-TV에서 느낌표라는 프로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기획 프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프로에서 추천하는 책을 두려움 없이 학과 홈페이지에 반복해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직접 읽거나 개인적인 추천 도서를 싫기도 했지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건 학과 학생들 다수가 느낌표 선정도서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부정적인 관점으로 오히러 선정된 도서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었었다. 의아했다. 책과 가장 밀접한 국문과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선정도서를 마다하다니!
하지만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현상은 아니었고, 일부 교수님들이나 (다른 학교를 포함해서) 지식인들도 느낌표 선정 도서에 부정적인 시각을 적잖게 보이고 있었다. 왜 였을까?
이등병이었을 때. 지금은 전역하고 없는 당번병이었던 지승환 병장이 내 자리를 찾아와 한참동안 캐 물었던 질문이 있다. 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나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도 아니고,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도 아니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르느냐는 질문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나름 일반인들과 다른 기준이나 분류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표였던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뚜렷한 선택 기준이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감성적으로 와 닿는 책을 고른다면 고를까. 마땅히 알려 드릴만한 기준은 없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대학시절보다 더 많이 독서를 하게되면서(자율적인 독서를 말한 것이다. 과제나 논문 때문에 읽었던 것을 포함하면 대학때가 더 많았지만) 나도 모르게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고, 선택함에 있어서 몇가지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작가중심의 읽기가 시작되었다. 으레 국문학도들이나 다독자들이 이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라한 것 같긴 하다. 최근에 내가 공지영이나 김영하의 작품을 줄이어 찾아 읽는 것이 그것이다.
한 작가의 생애를 따라(또는 거슬러) 작품을 읽는 것은 과장하여 작가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보는 것과 같다. 작가가 살았던(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대와 경험들, 만남들, 아픔과 사랑, 슬픔과 기쁨들.. 수 많은 사유들. 그것들이 작가의 연대기적 순서와 맞물려 나와 합일되어 가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면 이 작업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두번째가 자유연상에 의한 읽기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자유연상'이라고 썼는데, 자유연상은 말 그래도 생각이 아무렇게나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간다는 의미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연상되는 다른 책을 곧 이어 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전공 책 읽기에서 버릇이 되어 버렸다. 끝말 잇기를 하듯, 주석을 찾아 읽듯 말이다. 이런 읽기는 내용에 대한 깊이를 더욱 세밀하게 하는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봉순이 언니」의 감상평을 쓸려고 했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지 않나 싶다. 「봉순이 언니」가 대표적인 느낌표 선정도서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당시의 분위기에 휩슬려 당당히 느낌표 선정도서에 선정이 되어 대형서점 진열대를 가득 채웠던 「봉순이 언니」를 의식적으로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와서 내 안에서 정립되어 가는 작가중심이 책읽기를 통해 「봉순이 언니」를 꺼네 읽게 된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에 생각해보니 이런 것이었다. 대학시절 일부 사람들이 느낌표 선정도서를 사양했던 까락은 책을 선정하는데 있어 기준이라는 것은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영향력 있는 매체가 쉽사리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느낌표는 엄청난 효과를 거두며 일부 선정도서를 베스트셀러로 올리는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반면에 다른 책들은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읽힐 기회조차 동등하게 갖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을 우려했던 것이었다.
말미에「봉순이 언니」를 읽은 감상을 짧게 적자면, 「봉순이 언니」는 느낌표에서 선정할 만큼 좋은 작품성을 띄고 있었다. 공지영 소설 대게가 그렇듯 자신의 삶을 드러내며 때로는 환상성을 제공하며, 때로는 사실주의에 열중하며 염증나는 세상과 희망적인 감수성을 동시에 자아내고 있다. 자신의 생애 첫사람이었으면서 가장 불행했던 봉순이 언니를 제3자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다섯살 답지 않은 조숙함으로, 즉 내면에 있는 '나'는 30년이 지난 '나'인 동시에 시간은 60년대의 서울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 특유의 희망적인 메세지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뷔작 동트는 새벽에서부터 최근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봉순이 언니에서도 공지영은 나이를 들어가며 포기하는 것도 많지만 여전히 희망이라는 끈을 내려놓지 않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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