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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9일 금요일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실망스럽더라구요"
서점에서 처음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을 들었을때 함께 따라왔던 후배가 했던 말이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애써 피해왔던 책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내심 공지영의 여러 소설들을 두서없이 읽어냈던 내 노력에 서운함을 남기지 않으려고 빨간것이 예뻐 보이는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우선 낯설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지영의 초기작 「동트는 새벽」이나 「고등어」,「봉순이 언니」를 최근에야 읽었던 나로서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을 읽었음에도 '사랑'이라는 주제와 '한일문제'라는 사회적인 쟁점, 그녀 답지 않게 해피앤드로 이어지는 결말이 어쩐지 그녀 답지 않음으로 느껴졌던것 같고, 아마도 이것이 후배의 실망감을 내게도 전하는 것 같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로 이미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둔 츠지 히토나리의 제안으로 쓰게 되었다는 이 소설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컨셉트로 두 소설가가 사랑하는 남녀의 입장에서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덕분에 책도 빨간색의 공지영의 것과 파란색의 츠지의 것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아직 빨간책(?)밖에 읽지 못했다.)

공지영이 후기에서도 남겼지만 이 소설을 쓰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한일간의 문제라는게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소설 한 권으로 풀어질 만큼 어설픈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국가간의 묵은 감정을 풀어보고자 했던 노력은 진심어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일본 작가들의 베스트 소설들이 적잖게 보이는데 그것을 그대로 읽어대는 일보다는 그들 작품 속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녹여낸다면 그것 역시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고, 정말 뜻하지 않은 기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교집합을 마련할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공지영이라는 그 이름만을 두고,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이라는 빨간 책 한 권만을 앞에 두고 몇 자 적어보자면 기대를 가지기엔 그저 이름뿐인 소설이 아니었나 싶었다. 특히 일본에 대한 감정이 개인적인 것에서 국가적인 것으로 확대되는 모습이 조립식 건물마냥 뚝딱 설계되어 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해피앤드로 가는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적이지 않나 싶었다.

2006년 11월 3일 금요일

「봉순이 언니」/ 공지영

재학중이던 때, 그 때도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였는데 국문학과였으므로 좋은 책을 추천하는 메뉴도 있었다. 처음 그 콘텐츠를 채우기 시작할 때 마침 MBC-TV에서 느낌표라는 프로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기획 프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프로에서 추천하는 책을 두려움 없이 학과 홈페이지에 반복해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직접 읽거나 개인적인 추천 도서를 싫기도 했지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건 학과 학생들 다수가 느낌표 선정도서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부정적인 관점으로 오히러 선정된 도서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었었다. 의아했다. 책과 가장 밀접한 국문과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선정도서를 마다하다니!
하지만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현상은 아니었고, 일부 교수님들이나 (다른 학교를 포함해서) 지식인들도 느낌표 선정 도서에 부정적인 시각을 적잖게 보이고 있었다. 왜 였을까?

이등병이었을 때. 지금은 전역하고 없는 당번병이었던 지승환 병장이 내 자리를 찾아와 한참동안 캐 물었던 질문이 있다. 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나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도 아니고,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도 아니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르느냐는 질문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나름 일반인들과 다른 기준이나 분류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표였던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뚜렷한 선택 기준이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감성적으로 와 닿는 책을 고른다면 고를까. 마땅히 알려 드릴만한 기준은 없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대학시절보다 더 많이 독서를 하게되면서(자율적인 독서를 말한 것이다. 과제나 논문 때문에 읽었던 것을 포함하면 대학때가 더 많았지만) 나도 모르게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고, 선택함에 있어서 몇가지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작가중심의 읽기가 시작되었다. 으레 국문학도들이나 다독자들이 이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라한 것 같긴 하다. 최근에 내가 공지영이나 김영하의 작품을 줄이어 찾아 읽는 것이 그것이다.
한 작가의 생애를 따라(또는 거슬러) 작품을 읽는 것은 과장하여 작가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보는 것과 같다. 작가가 살았던(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대와 경험들, 만남들, 아픔과 사랑, 슬픔과 기쁨들.. 수 많은 사유들. 그것들이 작가의 연대기적 순서와 맞물려 나와 합일되어 가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면 이 작업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두번째가 자유연상에 의한 읽기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자유연상'이라고 썼는데, 자유연상은 말 그래도 생각이 아무렇게나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간다는 의미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연상되는 다른 책을 곧 이어 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전공 책 읽기에서 버릇이 되어 버렸다. 끝말 잇기를 하듯, 주석을 찾아 읽듯 말이다. 이런 읽기는 내용에 대한 깊이를 더욱 세밀하게 하는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봉순이 언니」의 감상평을 쓸려고 했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지 않나 싶다. 「봉순이 언니」가 대표적인 느낌표 선정도서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당시의 분위기에 휩슬려 당당히 느낌표 선정도서에 선정이 되어 대형서점 진열대를 가득 채웠던 「봉순이 언니」를 의식적으로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와서 내 안에서 정립되어 가는 작가중심이 책읽기를 통해 「봉순이 언니」를 꺼네 읽게 된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에 생각해보니 이런 것이었다. 대학시절 일부 사람들이 느낌표 선정도서를 사양했던 까락은 책을 선정하는데 있어 기준이라는 것은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영향력 있는 매체가 쉽사리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느낌표는 엄청난 효과를 거두며 일부 선정도서를 베스트셀러로 올리는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반면에 다른 책들은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읽힐 기회조차 동등하게 갖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을 우려했던 것이었다.

말미에「봉순이 언니」를 읽은 감상을 짧게 적자면, 「봉순이 언니」는 느낌표에서 선정할 만큼 좋은 작품성을 띄고 있었다. 공지영 소설 대게가 그렇듯 자신의 삶을 드러내며 때로는 환상성을 제공하며, 때로는 사실주의에 열중하며 염증나는 세상과 희망적인 감수성을 동시에 자아내고 있다. 자신의 생애 첫사람이었으면서 가장 불행했던 봉순이 언니를 제3자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다섯살 답지 않은 조숙함으로, 즉 내면에 있는 '나'는 30년이 지난 '나'인 동시에 시간은 60년대의 서울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 특유의 희망적인 메세지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뷔작 동트는 새벽에서부터 최근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봉순이 언니에서도 공지영은 나이를 들어가며 포기하는 것도 많지만 여전히 희망이라는 끈을 내려놓지 않고 있어 보인다.

2006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with 이혜진(2006.10.12)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보고 책과 같은 느낌으로 감상을 적기란 쉽지 않다.
단지 소설에서 모티브만 가져온 것이라면 감독의 철학을 엿볼수도 있겠지만 본 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책과 마찬가지의 질문을 내 던지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작은 감정들을 영화에서는 쉽게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런 멜로나 드라마류의 영화를 보고 있을 땐 작은 감정들이 점점이 모여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한 덩어리로 울컥하는 그 맛이 일어나는데 책에서만큼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단지 내용을 알고 본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싶다.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면 책을 봤든 안 봤든 관객을 똑같이 평등하게 울릴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공지영의 최근작이 기대 이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극장을 찾았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나름 감동있게 읽었고, 오랜만에 내게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것이었기에 그만큼의 기대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안고서 묵묵히 지켜본 영화다.

이 계절 잡아줄 손가락이 있는 남자와 여자에게는 제법 행복한 두시간이 될 수 있겠지만 공지영이 다만 사랑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썼던 작품이 아니었기에 감독 역시 사랑해 라는 이나영의 목 메인 목소리보다는 끊어지는 남자의 숨결을 차라리 들려주며 우리를 울게 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 작품이었다.

2006년 10월 4일 수요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공지영

삶이란 무엇인가? 상투적인 것을 싫어한다는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질문은 너무나 상투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마침표를 검지손가락 끝으로부터 그어- 떼었을 때 머리속에서 불쑥 떠오르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 나는 아주 늙어버린 나이가 되기 전에 - 어쩌면 빠른...- 그 나이부터 '죽음'에 대한 경계를 찾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경찰에게 붙잡힌 순간 최고수들은 이미 죽음에 맞닥드린 것과 같다라는 글처럼 나는 식어버린 아버지의 손을 쥐어 보면서 내 생이 끝자락을 설핏 느꼈던 것 같다.그 뒤로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은체 내 감각의 일부가 되어 갔고, 죽음으로 다가서는 걸음은 두려울지 몰라도 죽음에 이르는 찰라의 그것은 나를 무섭게 만드는 힘이 되어 갔다. /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체 시큰해진 눈물을 느낄 수 있었던게 언제인가 싶다.
솓아지는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에 차마 흘리지만 못한 것 같다. 3번의 자살을 기도한 - 전직 가수이자 잘나가는 교수인- 여자와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최고수(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남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두 사람은 세상에서 유일한 짝이 되어 서로에게 생의 의미가 되어 간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은 온전하지 못하고, 삶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언제나 그렇듯 공지영의 소설은 사랑을 밑바닥에 깔고 있으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감동을 남겨준다. 최근에 영화로 개봉하면서 '우행시'라는 짧은 제목으로 더 귀에 익은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영화제목처럼 언듯 한 편의 아름답게 슬픈 시가 아닌가 싶은 감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이전 작품인 고등어에서 두 남녀의 사랑 사이에 80년대의 시대적 아픔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면, 이 작품에는 90년대 이후의 삶에 대한 '장애적 자아'의 강렬한 회복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 나는 때로 생각한다. 지나가는 기차나 네 바퀴 달린 것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뛰어들 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 몸을 살랑 부는 바람에 맡기고 밀려 나갈수 있음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온기가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을지도 모름을! 하지만 오늘도 그 날, 그 병원 영안실에서 내 손에 옮겨진 기운이 체 가시지 않아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용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

「고등어」 / 공지영

시장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생선중 하나가 고등어다.
백자반이 되어 소금에 절여 있는 고등어. 하지만 그것이 살아 있을 적에, 그러니까 예전에는
푸른 바다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놈이었을 것이다. 푸른 등을 가지고, 해면을 뚫고 쏟아지는 햇볕을 받으면서
떼를 이루며 헤엄쳤을 것이다. 그것은 뜨거움이었을 것이며,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고등어」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이야기다. 그리고 불륜이다. 덕분에 3명의 여자가 추가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한 남자와 그의 사연에 얽힌 네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옛 애인과 현재 애인, 한번의 결혼을 통한 이혼한 부인과 하나뿐인 딸.
소설은 옛 애인 노은림의 유고 일기로부터 시작해서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미끄러져 나간다.

단순히 불륜을 다루고 있는 소설일수도 있다. 하지만 공지영은 등이 푸르던- 바다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고등어를 떠올리며 백자반이 되어버린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거울에 비추듯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80년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가져다 줄지 모르는 책일지 모르겠다.
흔히 민주화운동 세대라고 불리우는 당시의 20대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투쟁 다음의 것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수단이나 도구, 또는 부수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뜨거움을 달래는 중요한 것이었음을 뒤늦세 후회하기도 한다.

시대와 시대적 사상, 그리고 사랑이 서로 맞물려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포기되거나 실종되는 이야기.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주인공들의 이야기.

「빗방울처럼 나는 외뤄웠다」 / 공지영

공지영에게 반한듯 하다. 병영 도서관을 개장하고, 처음 읽었던 책이 「고등어」였는데 이후 멈추지 않고, 공지영의 작품을 읽어대고 있다.
그녀의 등단작인「동트는 새벽」찾아 첫번재 소설집「인간에의 대한 예의」를 읽고, 영화를 떠나(사실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근 출판한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외뤄웠다」까지 읽게 되었다.
한 사람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읽어가는 것은 국문학에게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지만 이렇게 자의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에 빠져 두서 없이 찾아 읽기는 처음의 일이다.
몇 권의 장편과 단편을 읽어가다보면 자연스레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어리게 마련이다. 때 맞춰 읽게 된 샘이다.

공지영은 90년대 등장한 신세대 작가중 한 명이다. 고리타분한 국문학계에서도 그녀의 문학적 행보에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판타지와 외설류가 범람하는 문학의 위기 시기에 그나마 '진정성'을 지켜가며 신세대적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작가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는 80년대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이 격렬하지도 않았으며, 60년대의 전후세대적 문학관도 찾기 어렵다. 40년대의 식민지 문학을 살피기도 어렵다. 그만큼 색이 없는 문학이 잉태하기 쉽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글쓰기가 양태되고 새롭다고 하는 문학들이 우후죽순 솟아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 것이 공지영의 「동트는 새벽」이었고, 그녀는 일순간 진보적 색채를 띤 신세대 작가로 눈에 띄이게 된다.

이미 영화화 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나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에서 소개된 「봉숭이 언니」, 최근 개봉하여 화재가 되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녀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10년 넘는 시간동안 여러편의 장편과 단편, 산문집 등을 출간한 그녀지만 생각보다 공백기도 많았다. 그녀 내면에서 일고 있는 여러가지 감정의 까닭일 것이다.
이 책은 소설과 다른 그녀의 삶과 사랑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담은 편지다. J에게 보내는 여러편의 시와 편지는 왜 그녀가 작가가 되고, 저러한 작품들을 쓰게 되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작가 공지영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당신이라면 한번쯤 찾아 읽어볼만하지 않나 싶다.

「반짝 반짝 빛나는」 / 에코니 가오리

최근의 읽기 경향을 살펴보면 부쩍 일본문학 작품의 수요가 는것 같다.
사정을 살펴보면, 간결하고 전개감 있는 문체와 사유의 독특함이 기존의 대부분의 우리문학과 다름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얼마전 부탁말이 없었는데도 보내진 책 한권이 있었다. '반짝 반짝 빛나는'이라는 동화책같은 제목의 일본소설이었다. 기본적으로 일본문학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애써 찾아 읽었던 기억은 없었다. 그저 동생이 추천해서 받아본 책일 뿐이었고, 그렇게 처음으로 일본소설을 읽게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정신병을 가진 여자와 동성애를 가진 남자 그리고 남자의 애인(남자)의 얽힌 사연을 다룬 작품이다. 삼각관계라면 진부하리만큼 많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다루어져 왔지만, 남자의 동성애와 여자의 정신병 증세는 이 작품이 사뭇 파탄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최근 공지영의 몇몇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바는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 주인공들은 어딘가 모자르며, 장애적이며 불완전하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평범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않은 인간들. 그런 느낌을 이 작품에서도 똑같이 받게된 것은 공시대의 공감대였을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랄까? 정신병을 가진 여자는 동성애를 가진 남편으로부터,
동성애를 가진 남자는 남자의 애인으로부터, 남자의 애인은 정신병을 가진 여자로부터 서로가 가지지 채우지 못한 사랑을 스스로의 영역 안에서 만족시켜간다. 마치 밴다이어그램과 같이 세개의 원이 서로의 교집합을 만들듯이 말이다.

가끔 타 문화권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하면 뜻하지 않은 이질감으로 깜짝 놀라움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 작품 속에서도 '호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제의 본질을 해소하는 방법 내지는 접근하는 시선이 사뭇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불완전한 것들, 동성애-, 정신병-그런 것들을 "반짝 반짝 빛나-"도록 이해시키는 작가의 담대함과 글솜씨가 참으로 놀라웠던 작품이었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