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채 적국의 스파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편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식상한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헐리웃에서는 '007'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유명한 스파이의 존재. 하지만 우리에겐 '간첩'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더욱 와닿는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안개속을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안개속을 김영하가 새삼 들쑤시기 시작했다.
대개의 깅영하 소설이 그러하듯 이번 작품 역시 쉽사리 결론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라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메세지라든지 가슴 뭉클한 교훈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아침 07:00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07:00가 되면 끝이 난다. 최인훈과 주인석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작품에서 시간적 배경을 '하루'로 한정하는 기능들이 나타나 있었으나 장편의 분량으로 하룻동안의 이야기를 담는 노력은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인 기영과 아내 마리, 딸 현미를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하루는 서로에게 배타적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는 묘한 갈등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작품의 기교가 엿보인다.
작품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간첩 '김기영'은 21살때 남한으로 내려와 작전을 수행했으나 10년 전부터 '끈'이 떨어져 완전히 남한 사회에, 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며 가정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늘 아침 갑자치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고, 그 이메일은 그를 '4번 명령'에 의해 북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기영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로써의 자수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없었다. 단 하루동안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첩 이야기는 분단된 조국에서 특수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어렵지 않게 다룰수 있는 줄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김영하는 '북'을 단순히 분단된 조국의 적국으로 묘사하지 않고, '남한'과 다른,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도록 디자인 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객관적인 여러 나라중 하나로 그려내면서 주인공 즉 가정의 남자. 아버지, 남편으로서 아내와 딸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분단된 현실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간첩'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생각보다 멀리 다른 곳에 놓여져 있어 보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하루'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의 전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휴대폰, 인터넷 등)을 이질감 없이 작품속에서 녹여내고 있으며, 같은 시간속에서 다시금 분절되어 가는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은 또 하나의 단편들로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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