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은희경
포스트 잇 / 김영하
아마도 군대에서 읽을 마지막 책들이 되지 않을까?!
25일 휴가 출발!
본의든 타의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감정이 채 식기전에 글을 남겨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키보드에 손가락들을 정렬했을 때 수 초안으로 시작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더욱 나를 시달리게 하곤 한다. 지금이 그렇다.
김영하의 소설이라면 두 편의 영화산문집과, 한 편의 소설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읽어버렸는데 아직도 그에 대한 깊이를 나는 섶불리 끄집어 낼수가 없다. 내 읽기의 눈이 아직 그 정도일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소설가의 상상력에 대한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특히나 오늘 읽기를 마친 「검은 꽃」은 며칠전 읽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단지 며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조금 전까지 황망한 마음을 거둘 여유가 없이 외롭고, 쓸쓸해지게 만들었다. 대한제국 시절 멕시코 이민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지만, 정작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보다는 작가만큼이나 떨어져 읽어내리고 있는 나, 독자의 시각이 매마르고, 너무 갇혀 있었지 않나 하는 충격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가 2007년이니까 김영하의 문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세상에 존재를 알린지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텍스트는 고대로부터 '사랑'에 이어 가장 많은 담론의 주제가 되었고, 소설의 한 면을 이끄는 마차가 되어 왔었다. 하지만 '자살'을 충동질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소설은 두 폭의 '죽음'에 대한 그림과 두 명의 여자의 '자살'을 통해서 '자살 권리론'을 주장하고 있다. 소설은 또한 액자소설양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자살청부업자'는 곧 작중화자이다. 그를 통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두 여인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으며, 또 다른 '자살 희망자'를 찾아 마로니에 공원을 헤메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작가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살 권리론'을 마땅히 여겨 어디선가 자신을 짐짓 바라보는 '자살청부업'을 의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영하는 액자 밖에서 또다른 시선을 둠으로써 '자살청부업'의 부정함을 밝힘과 동시에 현실속에서의 우리들이 서로를 자살로 내몰고 있는 자살청부자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96년에 발표되었고, 99년에 실재로 자살청부업이라는 신종 범죄가 뉴스에 등장하자 소설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뒤로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크게 몰아친 일도 있었다. 외국의 어떤 사람은 '안락사'장면을 그대로 녹화하여 세상에 알린 적도 있었다. '안락사'는 '자살'의 어두운면을 걷어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편안함과 '스스로 죽을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로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소설속 작중화자는 일종의 '안락사'를 위한, 도움을 주는 도우미와 같은 존재이다. 두 여인으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방황을 거두고 편안해질 것을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자살방법을 소개하고, 확실하게 자살로 이끌고, 뒤 끝 없는 깨끗한 자살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다.
시간은 한참을 더 흘러 10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책이 되었다. 이 소설이 앞으로 50년 백 년을 넘어 한국 문학사에 한 지점에 의미있는 깃발을 꽂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쳐 두더라도 '자살'이 가지는 우리들의 의식과 인식, 가능성과 현실의 한계를 은밀한 곳으로부터 토해내게 만든 것은 분명 쉽지 않는 일이었고, 대단한 것이리라.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의미로의 자살. 하지만 이 세계에서 자살은 결국 타인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의 다름 아닌 것이라는 진짜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김영하는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10년이 지난서도 새삼 이 책을 새것처럼 고치지 않고 10년전 가졌던 절망감과 아픔, 그 치기어린 감성을 고스란히 지닌글로써 다시 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채 적국의 스파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편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식상한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헐리웃에서는 '007'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유명한 스파이의 존재. 하지만 우리에겐 '간첩'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더욱 와닿는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안개속을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안개속을 김영하가 새삼 들쑤시기 시작했다.
대개의 깅영하 소설이 그러하듯 이번 작품 역시 쉽사리 결론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라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메세지라든지 가슴 뭉클한 교훈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아침 07:00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07:00가 되면 끝이 난다. 최인훈과 주인석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작품에서 시간적 배경을 '하루'로 한정하는 기능들이 나타나 있었으나 장편의 분량으로 하룻동안의 이야기를 담는 노력은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인 기영과 아내 마리, 딸 현미를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하루는 서로에게 배타적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는 묘한 갈등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작품의 기교가 엿보인다.
작품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간첩 '김기영'은 21살때 남한으로 내려와 작전을 수행했으나 10년 전부터 '끈'이 떨어져 완전히 남한 사회에, 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며 가정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늘 아침 갑자치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고, 그 이메일은 그를 '4번 명령'에 의해 북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기영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로써의 자수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없었다. 단 하루동안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첩 이야기는 분단된 조국에서 특수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어렵지 않게 다룰수 있는 줄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김영하는 '북'을 단순히 분단된 조국의 적국으로 묘사하지 않고, '남한'과 다른,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도록 디자인 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객관적인 여러 나라중 하나로 그려내면서 주인공 즉 가정의 남자. 아버지, 남편으로서 아내와 딸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분단된 현실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간첩'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생각보다 멀리 다른 곳에 놓여져 있어 보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하루'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의 전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휴대폰, 인터넷 등)을 이질감 없이 작품속에서 녹여내고 있으며, 같은 시간속에서 다시금 분절되어 가는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은 또 하나의 단편들로 느껴질 정도다.
평소 문학 책을 읽어내지 못하?사정가운데에도 유독 눈에 띤 책이 있었다.
김영하가 쓴「당신의 나무」라는 소설이다. 굳이 감상평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와 닿는 것이 한가지 있어 몇자 적어본다.
주인공 남자는 앙코르를 방문하면서 수천년간 자리를 지켜온 유적지를 보고 특별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유적지를 감싸 안은 거대한 나무를 보면서 또 다른 느낌(불편함?)을 받는다. 나무를 악마처럼 느끼는 감정이다. 그 순간 한 승려가 다가와 저 나무가 있어 이 유적지가 긴 세월 버틸수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유적지는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역사속으로 사라질수 있었음에도 저 나무뿌리가 흉물스럽게 감싸쥐고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서서 이렇듯 바라볼수 있다는 얘기.
작가 김영하는 작품속에서 남녀간의 관계가 서로에게 상처주지만 결국 서로를 지탱하게 해주는 모습으로 앙코르 유적의 나무를 그려준다. 비단 남녀관계일 뿐일까? 어차피 사람살이다. 사회든 군대든. 너와 내가 있어서 함께라는 말이 있고, 동지와 동료 전우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선진병영이란 무엇인가? 나는 도무지 그 말의 뜻을 헤아릴 이해력이 모자른가 보다. 백날 설문조사를 받고, CLUE라는 범인찾기 게임이라도 하듯 '때린 자"를 찾아내는 숨박꼭질을 시작한지도 1년이 넘었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처음 느껴졌던 감정은 황무지다. 사막이다.
나무 한그루 자랄 수 없어서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곳 없고,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곳. 그래서 혼자 걸어가야 하고, 혼자 견뎌야 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지고, 일탈하고, 좌절하고 오아시스만 찾아 헤메다 텁텁한 흑모래를 되씹으며 숨을 죽여가는 영혼들이 가득한 곳. 사막- 사회가 그렇고, 부대가 그렇고. 이 세상이 그렇게 변해간다. 자신의 나무 한 그루 찾아내거나 심을 줄 모르는 영혼들이 늘어간다. 안타깝다.
지금 내 목을 죄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번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손이 단지 내 숨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중적이다. 그렇게 말이다. 당신의 나무를 찾아보자.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