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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0일 금요일

이번 휴가때 사 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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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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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 김영하

아마도 군대에서 읽을 마지막 책들이 되지 않을까?!
25일 휴가 출발!

2007년 4월 19일 목요일

「검은꽃」/ 김영하

본의든 타의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감정이 채 식기전에 글을 남겨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키보드에 손가락들을 정렬했을 때 수 초안으로 시작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더욱 나를 시달리게 하곤 한다. 지금이 그렇다.

김영하의 소설이라면 두 편의 영화산문집과, 한 편의 소설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읽어버렸는데 아직도 그에 대한 깊이를 나는 섶불리 끄집어 낼수가 없다. 내 읽기의 눈이 아직 그 정도일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소설가의 상상력에 대한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특히나 오늘 읽기를 마친 「검은 꽃」은 며칠전 읽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단지 며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조금 전까지 황망한 마음을 거둘 여유가 없이 외롭고, 쓸쓸해지게 만들었다. 대한제국 시절 멕시코 이민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지만, 정작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보다는 작가만큼이나 떨어져 읽어내리고 있는 나, 독자의 시각이 매마르고, 너무 갇혀 있었지 않나 하는 충격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1월 20일 토요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올해가 2007년이니까 김영하의 문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세상에 존재를 알린지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텍스트는 고대로부터 '사랑'에 이어 가장 많은 담론의 주제가 되었고, 소설의 한 면을 이끄는 마차가 되어 왔었다. 하지만 '자살'을 충동질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소설은 두 폭의 '죽음'에 대한 그림과 두 명의 여자의 '자살'을 통해서 '자살 권리론'을 주장하고 있다. 소설은 또한 액자소설양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자살청부업자'는 곧 작중화자이다. 그를 통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두 여인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으며, 또 다른 '자살 희망자'를 찾아 마로니에 공원을 헤메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작가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살 권리론'을 마땅히 여겨 어디선가 자신을 짐짓 바라보는 '자살청부업'을 의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영하는 액자 밖에서 또다른 시선을 둠으로써 '자살청부업'의 부정함을 밝힘과 동시에 현실속에서의 우리들이 서로를 자살로 내몰고 있는 자살청부자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96년에 발표되었고, 99년에 실재로 자살청부업이라는 신종 범죄가 뉴스에 등장하자 소설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뒤로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크게 몰아친 일도 있었다. 외국의 어떤 사람은 '안락사'장면을 그대로 녹화하여 세상에 알린 적도 있었다. '안락사'는 '자살'의 어두운면을 걷어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편안함과 '스스로 죽을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로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소설속 작중화자는 일종의 '안락사'를 위한, 도움을 주는 도우미와 같은 존재이다. 두 여인으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방황을 거두고 편안해질 것을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자살방법을 소개하고, 확실하게 자살로 이끌고, 뒤 끝 없는 깨끗한 자살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다.

시간은 한참을 더 흘러 10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책이 되었다. 이 소설이 앞으로 50년 백 년을 넘어 한국 문학사에 한 지점에 의미있는 깃발을 꽂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쳐 두더라도 '자살'이 가지는 우리들의 의식과 인식, 가능성과 현실의 한계를 은밀한 곳으로부터 토해내게 만든 것은 분명 쉽지 않는 일이었고, 대단한 것이리라.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의미로의 자살. 하지만 이 세계에서 자살은 결국 타인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의 다름 아닌 것이라는 진짜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김영하는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10년이 지난서도 새삼 이 책을 새것처럼 고치지 않고 10년전 가졌던 절망감과 아픔, 그 치기어린 감성을 고스란히 지닌글로써 다시 펴낸 것이 아닐까 싶다.

2007년 1월 5일 금요일

「빛의 제국」

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채 적국의 스파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편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식상한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헐리웃에서는 '007'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유명한 스파이의 존재. 하지만 우리에겐 '간첩'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더욱 와닿는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안개속을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안개속을 김영하가 새삼 들쑤시기 시작했다.

대개의 깅영하 소설이 그러하듯 이번 작품 역시 쉽사리 결론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라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메세지라든지 가슴 뭉클한 교훈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아침 07:00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07:00가 되면 끝이 난다. 최인훈과 주인석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작품에서 시간적 배경을 '하루'로 한정하는 기능들이 나타나 있었으나 장편의 분량으로 하룻동안의 이야기를 담는 노력은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인 기영과 아내 마리, 딸 현미를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하루는 서로에게 배타적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는 묘한 갈등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작품의 기교가 엿보인다.

작품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간첩 '김기영'은 21살때 남한으로 내려와 작전을 수행했으나 10년 전부터 '끈'이 떨어져 완전히 남한 사회에, 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며 가정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늘 아침 갑자치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고, 그 이메일은 그를 '4번 명령'에 의해 북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기영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로써의 자수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없었다. 단 하루동안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첩 이야기는 분단된 조국에서 특수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어렵지 않게 다룰수 있는 줄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김영하는 '북'을 단순히 분단된 조국의 적국으로 묘사하지 않고, '남한'과 다른,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도록 디자인 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객관적인 여러 나라중 하나로 그려내면서 주인공 즉 가정의 남자. 아버지, 남편으로서 아내와 딸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분단된 현실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간첩'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생각보다 멀리 다른 곳에 놓여져 있어 보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하루'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의 전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휴대폰, 인터넷 등)을 이질감 없이 작품속에서 녹여내고 있으며, 같은 시간속에서 다시금 분절되어 가는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은 또 하나의 단편들로 느껴질 정도다.

2006년 12월 1일 금요일

「왜 아랑은」/ 김영하

아랑전설을 아는가? 조선조 임꺽정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난을 일으키던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 저 멀리 밀양땅에서는 아랑이라는 여인이 죽임을 당하고, 새로 부임한 부사들은 하나같이 하룻만에 죽어 나간다. 의기로운 선비 하나가 자청하여 밀양으로 내려가 원혼으로 나타난 아랑의 속사정을 듣고서 다음날로 바로 범인을 잡아내고, 아랑의 시신을 찾아 후히 장을 치루어주었다는 이야기. 아랑의 말따라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범인의 상투위에 앉을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사건. 이 이야기가 아랑전설이다.

아랑전설은 민담이다. 그래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제법 다양하다. 기본적인 사건 개요는 같으나 그 과정에서 축약되거나 부풀려진 것이 많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아랑전설을 가지고 김영하는 아주 색다른 실험을 시도했다. 처음 막연하게 이 책을 잡았다면 어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분명 책은 김영하의 장편소설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김영하는 아주 드러내놓고 독자에게 함께 아랑전설을 소재로한 소설쓰기를 부탁한다. 1장부터 50장까지 이어지는 글쓰기 강의를 보는듯한 구성. 이 것이 '아랑은 왜'가 여느 소설과 다른 구성이다.

김영하는 아랑전설이라는 소재를 통해 작가가 어떤 식으로 소설을 엮어가는지(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어떻게 허구를 구성하는지) 독자에게 일러준다는 것으로 가장하여(포장하여) 또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독자까지를 소설속의 등장인물로 포섭하는 대담함을 보이고 있다. 아주 기가막힐 노릇 아닌가! 자신의 글판에 함부로 독자를 끌이다니! 역시 김영하로군! 하는 감탄사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2006년 11월 16일 목요일

「호출」/ 김영하

모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을 하고 있는 후배를 지난 휴가때 만난일이 있었다. 후배는 취재차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나를 반가워하자마자 왠 설문지 한 장을 건냈다. 설문지는 서너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쉽고 간단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짧은 토막 기사를 쓰기 위해서 인것 같았다. 질문중 하나가 최근 감상깊게 본 책은 무엇인가였는데 잠시 고심하다가 쓴 것이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였다. 최근에 읽은 것은 아니었으나 최근에 읽은 것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단편적이고, 애로시즘이 가득찬! 공허감이 팽팽하다 못해허탈하게까지 만드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전략!은 다시 「호출」이라는 소설집을 읽게 만들었다.
<사이에 「랄랄라 하우스」를 읽었지만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 특유의 글쓰기 전략이 묻어나 있는 책은 아니고 김영하 작가 자신의 생활수기를 재미나게 블로그 형식으로 이끈 책이었다.>

「호출」은 「당신의 나무」와 같이 여러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80, 90년대를 오가는 배경과 사랑과 배신 죽음에 대한 모티브가 강하게 깔려있는 것이 「호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섹슈얼리즘이나 애로시즘등에 집착함을 떠나 독자로 하여금 허탈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만의 독특한 전략은 신세대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감히 분석되기 힘든 부분인것도 같다. 파괴적이고, 분해적인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해체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분출하는 작가는 보기 드믈지 않나 싶다.

2006년 10월 30일 월요일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두 가지 측면에서 김영하는 다분히 '신세대'적이며, 최신의 문화적 충격을 문학적으로 던져주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그동안은 작가이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랄랄라 하우스」를 통해서 보여주는 김영하의 신세대다움은 기존의 한국 문학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친근하게 그의 '랄랄라 하우스'를 엿 볼 수 있다. 왜일까?

최근 인터넷(기술적인 면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 미니홈피다. 열풍이 다소 식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나 아직은 비주류가 주류인 미니홈피를 위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리라 본다.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는 이런 분위기에 파생되어 나온 미니홈피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본인은 미니홈피보다는 블로그 책이라고 보고 있으나 책의 디자인이나 형식이 미니홈피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올렸던 감상평이 김중태와 조엘의 블로그에서 발췌된 글 모음(책)이었는데 「랄랄라 하우스」역시 김영하의 개인 홈피에 담겨진 여러편의 짦은 글들과 사진, 음악 목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위의 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바탕이 되는 시스템이 블로그가 아니라 미니홈피라는 점(아마도 국내에서는 블로그와 미니홈피의 차이점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이지 않은 까닭으로 보인다. 엄연히 다름에도 말이다!)과 김중태와 조엘이 각 각 컴퓨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반해 김영하는 책으로 밥 빌어먹는 전형적인 글장인 것이다.

이와 같은 외형적인 특징으로도 드러나지만 사실 「랄랄라 하우스」는 작가 김영하가 얼마나 독자들과 소통을 원하고, 소통을 진행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이미 몇몇 단편작에서 독자들과의 소통을 은밀하게 고백했던 그였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통을 원해왔음을 알 수 있었는데(독자의 편지를 통해 쓴 소설도 있고, 서점등에서 독자를 모아놓고 작가가 낭독회를 해보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자기만의 미니홈피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생활의 단편들을 짧은 글들로 옮겨놓고, 독자들의 답글을 기다린다. 답글에 다시 작가인 김영하의 생각과 답변이 달리고, 그렇게 작가 김영하와 독자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일궈낸다.

일부 작가들이 이러한 홈페이지 또는 홈피를 이용하여 독자와 소통하는 것을 모르는것은 아니나 김영하의 경우 책 자체를 통해 소통하던 것에서 더욱 확장되어 활발하게 웹을 통한 소통을 이루어내고, 다시 오프라인의 책으로 증명해 보이는 작업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영하의 작품 답게 감각적이고 즐겁게 읽히는 이 책은, 정말 하나의 홈피를 보듯 즐길 수 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김영하의 홈피와 1촌이 된듯한 착각까지 드는 것은 어쩌면 작가 김영하의 노림수였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10월 4일 수요일

「당신의 나무」/ 김영하

평소 문학 책을 읽어내지 못하?사정가운데에도  유독 눈에 띤 책이 있었다.
김영하가 쓴「당신의 나무」라는 소설이다. 굳이 감상평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와 닿는 것이 한가지 있어 몇자 적어본다.
주인공 남자는 앙코르를 방문하면서 수천년간 자리를 지켜온 유적지를 보고 특별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유적지를 감싸 안은 거대한 나무를 보면서 또 다른 느낌(불편함?)을 받는다. 나무를 악마처럼 느끼는 감정이다. 그 순간 한 승려가 다가와 저 나무가 있어 이 유적지가 긴 세월 버틸수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유적지는 사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역사속으로 사라질수 있었음에도 저 나무뿌리가 흉물스럽게 감싸쥐고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서서 이렇듯 바라볼수 있다는 얘기.

작가 김영하는 작품속에서 남녀간의 관계가 서로에게 상처주지만 결국 서로를 지탱하게 해주는 모습으로  앙코르 유적의 나무를 그려준다. 비단 남녀관계일 뿐일까? 어차피 사람살이다. 사회든 군대든. 너와 내가 있어서 함께라는 말이 있고, 동지와 동료 전우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선진병영이란 무엇인가? 나는 도무지 그 말의 뜻을 헤아릴 이해력이 모자른가 보다. 백날 설문조사를 받고, CLUE라는 범인찾기 게임이라도 하듯 '때린 자"를 찾아내는 숨박꼭질을 시작한지도 1년이 넘었다. 이 소설을 읽고  가장 처음 느껴졌던 감정은 황무지다. 사막이다.
나무 한그루 자랄 수 없어서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곳 없고,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곳. 그래서 혼자 걸어가야 하고, 혼자 견뎌야 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지고, 일탈하고, 좌절하고 오아시스만 찾아 헤메다 텁텁한 흑모래를 되씹으며 숨을 죽여가는 영혼들이 가득한 곳. 사막- 사회가 그렇고, 부대가 그렇고. 이 세상이 그렇게 변해간다. 자신의 나무 한 그루 찾아내거나 심을 줄 모르는 영혼들이 늘어간다. 안타깝다.

지금 내 목을 죄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번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손이 단지 내 숨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중적이다. 그렇게 말이다. 당신의 나무를 찾아보자.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