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2007년이니까 김영하의 문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세상에 존재를 알린지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텍스트는 고대로부터 '사랑'에 이어 가장 많은 담론의 주제가 되었고, 소설의 한 면을 이끄는 마차가 되어 왔었다. 하지만 '자살'을 충동질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소설은 두 폭의 '죽음'에 대한 그림과 두 명의 여자의 '자살'을 통해서 '자살 권리론'을 주장하고 있다. 소설은 또한 액자소설양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자살청부업자'는 곧 작중화자이다. 그를 통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두 여인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으며, 또 다른 '자살 희망자'를 찾아 마로니에 공원을 헤메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작가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살 권리론'을 마땅히 여겨 어디선가 자신을 짐짓 바라보는 '자살청부업'을 의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영하는 액자 밖에서 또다른 시선을 둠으로써 '자살청부업'의 부정함을 밝힘과 동시에 현실속에서의 우리들이 서로를 자살로 내몰고 있는 자살청부자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96년에 발표되었고, 99년에 실재로 자살청부업이라는 신종 범죄가 뉴스에 등장하자 소설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뒤로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크게 몰아친 일도 있었다. 외국의 어떤 사람은 '안락사'장면을 그대로 녹화하여 세상에 알린 적도 있었다. '안락사'는 '자살'의 어두운면을 걷어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편안함과 '스스로 죽을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로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소설속 작중화자는 일종의 '안락사'를 위한, 도움을 주는 도우미와 같은 존재이다. 두 여인으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방황을 거두고 편안해질 것을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자살방법을 소개하고, 확실하게 자살로 이끌고, 뒤 끝 없는 깨끗한 자살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다.
시간은 한참을 더 흘러 10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책이 되었다. 이 소설이 앞으로 50년 백 년을 넘어 한국 문학사에 한 지점에 의미있는 깃발을 꽂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쳐 두더라도 '자살'이 가지는 우리들의 의식과 인식, 가능성과 현실의 한계를 은밀한 곳으로부터 토해내게 만든 것은 분명 쉽지 않는 일이었고, 대단한 것이리라.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의미로의 자살. 하지만 이 세계에서 자살은 결국 타인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의 다름 아닌 것이라는 진짜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김영하는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10년이 지난서도 새삼 이 책을 새것처럼 고치지 않고 10년전 가졌던 절망감과 아픔, 그 치기어린 감성을 고스란히 지닌글로써 다시 펴낸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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