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엽, 21세기 작가란 무엇인가 1999 p25~26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활자 매체와 사이버 스페이스 매체 사이의 물리적 차이이다. 그 차이는 두 매체가 똑같이 문자 텍스트로서의 문학을 구현할 때 더 잘 드러난다. 가령 활자-책과 시디롬-책을 비교해 보자. 책(冊)의 한자는 죽간 묶음의 상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모양, 얇은 것을 여러 장 겹쳐 맨 모양이다. 이 모양은 결코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와의 직접적인 접촉, 혹은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디롬-책은 컴퓨터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독자와의 접촉이 가능해진다. 컴퓨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시디롬-책은 간적접 접촉이라는 물리적 특징을 갖는다. 이 직접성/간접성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그것은 비판적 감각의 직접성 유무와 관계되지 않을까. 이점은 근대적인 책의 발생사를 돌아보게 해준다. 종이-인쇄 시대의 개막은 근대의 개막과 걸음을 같이했었다. 다수 민중을 몽매의 상태에 두고 지배층이 지식을 독점하는 그런 구조가 전근대의 권력의 매커니즘을 밑에서부터 받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종이-인쇄 시대의 개막은 민중에의 지식의 확산을 가능케 했다. 봉건 지배층이 인쇄를 통제하고자 했던 것은 그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종이-인쇄의 책의 승리는 곧 근대적 민중의 승리였다. 종이-인쇄의 책이 처음부터 새로운 근대적 권력의 메커니즘 형성과 밀접하게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집중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님은 부언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이버 스페이스 매체는 자본과 권력이 그 간접적 접촉의 틈새로 스며들기 쉽게 되어 있다. 그 틈새가 민주라든지 해방이라는 가치를 위해 기여하거나 혹은 긍적적 가치로서의 탈중심이나 차이를 위해 기여하기보다는 자본과 권력을 위해 봉사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그것은 근대적 권력의 해체를 가져올지는 몰라도 미증유의 새로운 권력, 탈중심과 차이라는 형태로 위장된, 한층 더 음험한 권력의 역설적인 전체적 지배로 연결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만약에 이런 혐의에 일리가 있는 것이라면, 활자 매체의 문학은 그의 존재를 위협하고 그의 자율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들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이때 작가는 그 싸움을 역사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고독한 존재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진술은 문학이 자신을 활자 매체에만 고착시키고 사이버 스페이스 매체를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외면은커녕 오히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사이버 스페이스 매체로의 문학의 확장은 이 새로운 매체를 자본과 권력의 관리로부터 일탈케 하고자 하는 비판 의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제도의 변화라든지 문학 정체성과 작가 정체성의 변화 같은 문제는 그 다음에야 성립되는 문제이다.
이 주 전쯤에 선생님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학교를 갔다.
동기들은 대부분 학술답사를 떠나고 없었지만
뭐, 그네들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스쿨버스에서 신애를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아무도 없는 과사의 문을 내가 재일 먼저 열었다.
과사는 어쩐지 너무나 지저분해 보였고, 책상 위에 날적이는
그나마 몇 날 몇 일의 일들이 읽기 좋게 적혀 있었다.
컴퓨터는 아직도 고장이 난 듯 그대로인 것 같았다.
만우관 뒤편 붉은광장에도 어느덧 봄이 가득해서
초록으로 가득찼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학교를 갔다.
동기들은 대부분 학술답사를 떠나고 없었지만
뭐, 그네들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스쿨버스에서 신애를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아무도 없는 과사의 문을 내가 재일 먼저 열었다.
과사는 어쩐지 너무나 지저분해 보였고, 책상 위에 날적이는
그나마 몇 날 몇 일의 일들이 읽기 좋게 적혀 있었다.
컴퓨터는 아직도 고장이 난 듯 그대로인 것 같았다.
만우관 뒤편 붉은광장에도 어느덧 봄이 가득해서
초록으로 가득찼다.
그런데 문득,
코스모스가 그리워졌다.
코스모스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