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내렸다. 언제나 어긋나곤 했던 일기예보가 이처럼 잘 맞아버리다니 괜히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창밖으로 재채기라도 한 듯 눈이 쏟아져 내린다. 지난 3월. 아마도 지난겨울의 마지막 눈이었을 듯싶다. 눈이 쌓인 곳은 정말 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병점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달리지 못하는 버스를 포기하고 종종걸음을 한 발씩 묶어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보였다. 캠퍼스는 온통 은빛으로 스케치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학생들을 반기는 눈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학생회관 앞이었나 보다. 03학번 녀석들의 눈싸움이 한참이었다. 어떤 녀석이 던진 눈이 여학생의 몸통을 그대로 때려 맞췄다. 파삭- 하며 부서지는 눈. 실수였었다. 한참을 하던 놀이에 너무 빠져있었는지 그저 조그마한 돌맹이 하나를 숨겨두었을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렇게 친구의 눈 밑을 찢어 놓다니. 두려움에 휩싸인 친구의 눈동자는 찢어진 눈 밑을 더욱 벌리며 붉은 핏방울을 주룩 주룩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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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텍스트 문학’이란 무엇인가?
첫 눈이 내렸다. 언제나 어긋나곤 했던 일기예보가 이처럼 잘 맞아버리다니 괜히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창밖으로 재채기라도 한 듯 눈이 쏟아져 내린다. 지난 3월. 아마도 지난겨울의 마지막 눈이었을 듯싶다. 눈이 쌓인 곳은 정말 흰 것 말고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병점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달리지 못하는 버스를 포기하고 종종걸음을 한 발씩 묶어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보였다. 캠퍼스는 온통 은빛으로 스케치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학생들을 반기는 눈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학생회관 앞이었나 보다. 03학번 녀석들의 눈싸움이 한참이었다. 어떤 녀석이 던진 눈이 여학생의 몸통을 그대로 때려 맞췄다. 파삭- 하며 부서지는 눈. 실수였었다. 한참을 하던 놀이에 너무 빠져있었는지 그저 조그마한 돌맹이 하나를 숨겨두었을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렇게 친구의 눈 밑을 찢어 놓다니. 두려움에 휩싸인 친구의 눈동자는 찢어진 눈 밑을 더욱 벌리며 붉은 핏방울을 주룩 주룩 쏟아냈다.
그저 써놓은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하이퍼텍스트 사용자가 연상하는 순서에 따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테오도르 넬슨(Theodore Nelson)이 고안한 시스템이다.
문학(Hypertext Literature)’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해를 돕고자 잠깐 동안의 연상을 통해서 써내려간 글이다. 우리는 자주 딴 생각이라는 것을 하곤 한다. 옳게 말해 공상 내지는 연상이라는 것인데, 아무 때나 어디서나 가능한 인간의 사고 작용이다. 결론부터 꺼내자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인간의 연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자 하는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기에 기회이자 도전이다.
문학(Hypertext Literature)’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해를 돕고자 잠깐 동안의 연상을 통해서 써내려간 글이다. 우리는 자주 딴 생각이라는 것을 하곤 한다. 옳게 말해 공상 내지는 연상이라는 것인데, 아무 때나 어디서나 가능한 인간의 사고 작용이다. 결론부터 꺼내자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인간의 연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자 하는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기에 기회이자 도전이다.
20세기 말 인문학의 위기와 책의 종말은 쉽게 무시할만한 이슈거리는 아니었다. 꽤나 심각했었고, 그 고민의 끝에서는 언제나 착잡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야 했다. 그 와중에 모난 돌처럼 튀어 나온 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수많은 연구자들과 인문학도들은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서 분석하고, 실험하기를 애썼다. 2001년 드디어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본격 하이퍼텍스트 문학- 디지털 구보 2001’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기대 반 걱정 반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던 ‘디지털 구보 2001’은 다시금 숱한 문제점과 고민덩어리들만을 남긴 채 인터넷 속의 ‘미라(mummy)’가 되어 버렸다.
그럼 위의 이야기가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자. 2004년 11월 26일은 정말로 첫 눈이 내린 날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정말이지 난데없이 쏟아져 내린 눈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 눈은 나로 하여금 지난 3월 캠퍼스를 뒤덮어 버린 지난겨울의 마지막 눈을 연상케 한다. 그 장면은 03학번 후배들의 눈싸움으로 이어지고, 눈싸움은 어린 시절 내가 던진 눈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친구의 피범벅이 된 얼굴로 바뀌어 진다. 썩 적절한 예가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글의 양상은 인간의 연상 작용과 같이 사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이어진다. 그런데 조금 더 그럴듯하게 하자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억이나 상황으로의 전이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눈싸움 장면이 어린 시절의 눈싸움 장면이 아닌 PC게임에서 심심풀이로 즐겼던 눈싸움 게임으로 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둥글게 뭉쳐놓은 그것이 아이스크림을 생각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각각의 사건이나 상황은 하나의 ‘마디(node)’가 되며, 마디와 마디를 잇는 연결선은 ‘링크(link)’가 된다. 그리고 분절된 이야기에 따라 링크를 따라 읽혀지는 마디는 각각 달라진다. 이렇게 달리 읽혀지는 독서로를 ‘경로(path)’라고 한다. 정리하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독립적인 수많은 마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디는 자신을 포함한 하나 이상의 마디와 링크된다. 다시 각각의 링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비선형성’을 이끌어 내는 구조다.
책은 첫 쪽을 시작으로 마지막 쪽까지의 선형적인 이야기 구성을 가진다. 물론 실험적이거나 특수한 경우 단선적인 서술 구조를 의도적으로 틀어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시절 이후 소설의 서술 구조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반면에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비선형성을 가지고 있다. 비선형적인 소설은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중간만이 강조된다. 또한, 모든 마디가 이야기의 시작이 되며, 동시에 끝이 된다. 어떤 마디로부터 어떤 마디를 거쳐 어떤 마디로 끝나는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수많은 경로를 통해 동일한 마디 구성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읽게 된다. 마치 수십 장의 단어퍼즐을 펼쳐놓고 상황마다 다른 단어를 조합하여 이야기를 꾸며 나가는 놀이와 같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위와 같은 서술 구조상의 특징으로 작가와 독자의 개념이 달라지는 모습을 만들어냈으며, 물리적인 공간의 책이 아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매체로의 확장을 가져왔다. 인쇄 문학의 작가들은 책이라는 고정의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다지거나 드러낼 수 있었으며, 책 속에 인쇄된 글자들은 불변함을 원칙으로 독자들을 강력하게 묶어두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위에 생성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누구에게나 ‘글쓰기’의 자유를 제공하며, ‘수정’과 심지어는 ‘삭제’의 권한까지를 부여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인 ‘참여’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인쇄 문학’과 가장 차이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매체의 차이일 것이다. 매체는 도구를 말하는 것이며, 도구의 변화는 문화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는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변화시켜온 문화를 살펴보면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다. 인간의 글(그림)이 동굴 벽에서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통해 종이에 담겨지기까지 인간의 이야기는 함께 변화해 왔다. 이제 디지털 문명의 시대를 뚫고 지나가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종이를 탈피하여, 디지털 신호로 기록되고 있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며 확장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을 매우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두와 같이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해서가 아니며, 더욱이 책의 종말을 걱정하면서 디지털 매체로 몸을 바꾼 ‘하이퍼텍스트 문학’을 옹호하는 것 역시 아니다. ‘디지털 구보 2001’이 거창하게 출발했다가 누군가에게 해부되기만을 기다리는 썩지 않은 시체가 되었듯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대부분의 논의가 담론적인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실험적인 것들이 간혹 나오기는 하나 문학이라 불릴만한 진정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독자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고, 작가의 위치를 위축시켜 창작에 대한 열의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인문학계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보수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인식과 반응이 빠르지 못하다. 오래두고 진지함을 더해 지켜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하이퍼텍스트’ 기술과 인터넷의 발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다. 새로운 길이 발견되었을 때 과감하게 내달려 보는 것도 때론 필요하지 않을까. 분명 외국의 비해 우리의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실험적이더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언어의 새벽’이나 ‘디지털 구보 2001’과 같이 한 두 편의 관련 작품을 진행시켜온 것에 비해 외국의 경우 2천개가 넘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을 포함한) 디지털 문학을 전자 협회(미국, http://directory.eliterature.org)에서 관리, 제공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단순히 서사 구조의 특이성만을 가지고 이해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이 아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타이포그라피(Typography, 문자의 형태를 이용한 시각적인 디자인)에서 멀티미디어(Multimedia, 동영상, 소리, 이미지가 텍스트와 결합)와 인터렉티브(Interactive, 상호작용에 의한 전개)까지 적용해볼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쇄 문학의 틀을 깨고 새로운 매체로 확장되어 간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이렇듯 인문학에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고, 또 다른 도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오래전 학과 잡지에 '하이퍼텍스트문학'에 대한 소개를 하기 위해서 썼던 짧은 글이다. 나름 신경쓰며 썼다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만 지워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내 애씀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기에 아까움이 조금 생겨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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