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 주일(토요일을 흔히 주말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드믈다. 하지만 나는 어색하지 않게 주일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며칠전 내린 비 덕분으로 제법 가을다운 추위가 느껴지는 날이었다. 가뭄 때문인지 단풍이 곱게 들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모처럼 맑게 갠 하늘과 쓸쓸한 바람은 가슴을 차갑게 쓸어내리기에 충분했다. 9월 내내 여단과 대대에서 음악회가 열렸고, 그보다 일찍 봄과 여름에는 몇차례 외지인들의 위문공연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위문공연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으면서도 꽤 오랜만에 찾아온 듯한 반가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보직이 보직인지라 캠코더와 카메라를 들고 조금 일찍 교회문을 열어 젖히고 자리를 잡았다. 이젠 너무나 구식이 되어버린 8mm 캠코더가 여전히 작동중인지 체크를 하고, 카메라의 벳터리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전원을 켰다가 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알파, 브라보, 찰리, 본부의 130여명의 인원들이 가득 들어차니 창 밖의 어둠이 서서히 덥혀져 옴이 느껴졌다. 음악이 시작되고, 찬양팀의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깰양은 아니고 나는 그다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한다. "보직이 보직인지라" 그저 캠코더와 카메라를 들고 대상을 촬영할 뿐. 흥겨운 찬양가와 구구절절 옳은 목사님의 말씀에도 싶사리 감동받거나 동화되지 못하는 쓸쓸한 인간중 한명이다. 특히 아무리 좋은 설교말씀으로도 결국은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논리에는 질려버린지 오래다. 딴지는 아니고, 그 좋은 말씀을 스님이 하셨다면 "부처님"을 따르도록 할 테고, 이슬람이였다면 "알라"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의 논지가 "어떤 신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니 여기까지로 말씨름을 멈추자. 그래 다소 늦은감은 있었지만 제법 가을 같았던 10월의 마지막 주일 밤. 서울의 반짝이는 어떤 동네에서 제법 선량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전방의 외딴 외로운 군중들을 위해 찾아왔다.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며, 말씀은 가슴을 뜨겁게 울리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어떤 이는 목이 메어져 오지 않았을까 하는 푸근한 심상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와중에 나 역시 한가지 사라지지 않고 되뇌어 지는 말이 있어 적는다.
인간은 질그릇같아서, 더러워지기 싶고, 깨지기 싶다. 인간에게는 네가지의 만남이 있고, 제1의 만남은 부모이며, 제2의 만남은 친구, 제3의 만남은 스승, 제4의 만남은 반려자일 것이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진리로 바꾸는 힘이 목사에게 있다면, 이날 밤 이 한 분의 목사님은 기독교에 꽤나 부정적인 내게도 설득력 있는 진리를 새겨주신 샘이다.
나는 강렬하지는 않으나 살아가며 만나는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전화번호 수첩에 적힌 지인들 뿐 아니라 그래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엮인 1촌들과 MSN 메신져에 등록되어 있는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 죽마고우부터,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함께 걸어온 세명의 친구들. 대학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 나를 키워주신 수 많은 선생님들과 회사 직장 동료들. 친구의 친구들. 홈페이지와 블로그와 미니홈피와 메신져와 채팅방, 그리고 음악방송에서 이어진 수많은 이름들. 다 외지도 못하고, 그네들 주소며 연락처를 다 적어두지도 못 할 만큼 만나온 사람들. 이제는 잊혀져 버린 사람들도 많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도 많다. 나는 항상 고민했다. 평생을 두고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훗날 나의 장례식을 찾아와 술 한잔 따라줄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려고 할 때 내게 있어 당신은 누구인가? 목사님은 그 많은 인연들 중에도 단연 위의 네번의 만남이 중요함을 새삼 일깨워 주셨다. 하지만 말씀하시길 첫번째, 세번째, 네번째의 인연은 나의 선택이 아닌 운명임을 강조하셨다. 결국은 두번째 만남인 친구만이 내 의지로 만날 수 있는 인연인 것인가. 곰곰 생각해 본다. 일전에 인터넷에서 음악방송을 하고 있는 지인 한분과 이런류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나보다 더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삶이 부대끼며 엮이어 가는 것을 힘겨워 하지 않았다. 항상 만남을 즐거워 하셨고, 기뻐 하셨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어떤 인연도 선택은 없었다. 모두가 운명같은 것이었고, 자연히 그러하게 만나지는 슬기로운 끈을 쥐고 있는 듯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번지듯 떠오르는 내 친구들의 얼굴들. 내 결혼을 위해 오징어 가면을 써주고, 내 아이의 돌반지를 마련해주며, 내 어머니의 장례에 나란히 서주며, 내가 묻힌 묘 위에 술 한잔 부어줄 친구들. 그 친구들을 내가 선택한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너무 매정하지 않은가? 적어도 내게 있어 두번째 만남 역시 운명이었음을 목사님의 좋은 말씀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질그릇같아서, 더러워지기 싶고, 깨지기 싶다. 하지만 내 친구 역시 질그릇이어서 내가 깨지고, 더러워져도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멀쩡한 자신을 깨뜨리면서까지, 때로는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인연이 바로 친구아닐지. 또한, 내 부모, 내 스승, 내 반려자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까. 목사님이 마지막에 제5의 만남으로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그 역시 운명이라면 친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에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연이란 것중에 순서는 없는 없었다. 나이와 같이 늙어가는 것이 시간이라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누가 만남을 시간과 같이 하던가.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운명처럼 내 곁에 와 있는 것이 인연인것을. 만남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하나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잘못된 만남이어서 운명이어서 내 더럽혀짐과 깨짐을 미룰 수 있는 것은 옳지 않다. 만남은 운명이고, 더렵혀짐과 깨짐은 선택인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삶이니까. 제5의 만남이 하나님이어서 앞서의 만남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기적과도 같은 말씀에도 내 선택이 없다면 하나님 역시 역전을 시킬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의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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