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4일 화요일

13층

영화 13층은 오랜시간 내가 가지고 있던 사유와 많이 닮아 있었다. 영화의 내용이나 스포일러를 알고 보기 시작한것은 아니다. 고전적인 느낌의 오프닝 씬 때문에 20세기 초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영화쯤 되나 싶었다. 하지만, 문제의 오프닝 장면은 가상의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이를테면, ?영화/메트릭스에 나타나는 메트릭스와 같은 공간 말이다. 즉, 전자문명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간세상.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메트릭스에서는 메트릭스 속의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반면(실제 인간들은 수면에 취해진채로 양식되고 있다.) 13층에서는 그들을 인격체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두 영화 모두 가상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진실'을 발견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메트릭스에서는 스미스와 같은 요원이 '진실'에 접근하는 인간을 처리한다. 반면, 13층에서는 그러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듯 하다. 13층에서는 '진실'을 발견한 사람이 반쯤 미쳐버려서 난폭해(?)지는 걸로 그려졌다.

13층은 또 한가지 메트릭스와 다르다. 가상의 공간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라는 점에서 같지만, 메트릭스의 경우 '단 하나의 세계'이다. 하지만, 13층은 '다층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있다. 이 점은 이연걸의 원맨쇼로 만들어진 '더 원'을 생각하면 된다. 우주에는 다수의 차원이 있고, 각각의 차원에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는 설정. 그래서 모든 '나'를 제거하면 나는 '더 원(신)'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13층에서는 완벽하게 같은 다수의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 자신들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 놓은 인간들[1]이 있어, 비슷한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좀 더 설명을 하자면, 부모 세계[2]의 A라는 사람이 가상 세계[3]에 접속[4]을 하면 미리 만들어 놓은 인간의 몸을 이용[5]할 수 있다. 즉, 자식세계의 '아바타'와 부모세계의 '나'는 동일한 인물이 된다. 생김만 다른 것이다. 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건 가상세계를 프로그래밍한 한 명이 실수로 가상세계에서 죽음을 당하면서, '아바타'가 부모세계로 올라온 것이다. 즉, '나'와 '아바타'가 서로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영화를 좀더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시점에서 또 하나의 '부모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메트릭스'는 단 하나의 가상 공간이었다. 하지만, 13층에서는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부모세계'가 다시 한번 '자식세계'가 되어버리는 역전을 보여준다. 즉, 주인공인 '나'마저도 또다른 '부모세계'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아바타'일 뿐이었던 것이다.

자, 다시 처음으로. 나는 오랫동안 '더 원'과 같은 세계관을 생각했다. 다차원적인 세계말이다. 지구는 하나가 아니고,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 그것은 동일한 시간이 아닌 앞서거니 뒤쳐지거니 하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짓는 경계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다르다면, 공간의 충돌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 어쩌면 우리 세계를 내려다 보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개미와 같은 곤충들을 내려다 보듯 우리 아래 또 다른 세계가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맨 인 블랙'의 '작은우주[6]'개념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13층은 우연히 본 영화였지만, 이러한 나의 오랜 망상(?)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그렇다고 난 누구의 아바타인가? 라고 고민은 하지 말라. 메트릭스의 창조자와 달리 우리 세계의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너그럽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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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바타
  [2] 가상 세계를 만들었으므로 부모 세계라고 하자
  [3] 자식 세계
  [4] 메트릭스와는 달리 레이져 쇼로 좀더 세련되게 접속한다
  [5] 온라인 게임에서 내가 캐릭터를 골라, 접속할 때마다 그 캐릭터를 나와 동일시하여 행동을 내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 13층에서 나오는 가상 현실 역시 온라인 게임의 발전적인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6] 작은 구슬 같은 것인데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또 다른 우자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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