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0일 화요일

나는 다시 들어간다

처음도 아니고, 오늘로 여섯번째가 되는 부대로의 복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 시간의 기분이라 함은 참 쓸쓸하다. 오늘이 마지막 복귀였으면 하는 마음이 부쩍 든다. 두꺼워진 계급만큼 마음의 층도 쌓여서 숨이 푹 삭아 버린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어떤 각오가 불현듯 끓어오르는데 지금의 각오가 흔들리지 않기를 떨리는 심장에 부탁해본다.

스물일곱, 인생의 터닝포인트

음력 설이 지났다. 참말로 새해 복 많이 받을 인사를 여기저기 많이도 했던 며칠이었던 것 같다.
예전처럼 시골집을 찾아가 어른들의 쌈짓돈을 염치없이 받아들지도 못했고, 나이든 값으로 먼저 인사를 올리러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나름 떡국값은 할 요량으로 2007년 정해년을 살아갈 궁리를 꽤나 했던 시간이긴 했다.

일단은 벚꽃이 지고, 녹음이 짙어져서 계절이 비로 잔득 젖어들기 전에 군복을 벗어야 하겠고,
곧바로 강남이든 홍대이든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서 내 몸을 의탁해야지 싶다.
입대전까지 아르바이트든 계약직이든 능력직은 아니었어도 재주가 거기 있었다면 그 일을 해야겠지 싶기는 해서 웹에지션시를 고민중이긴 하다. 하지만 코더라는 직책은 어지간해서는 눈에 들기도 어렵고, 첫째로 돈을 버는 수완으로는 썩 좋지는 않은것 같다. 학교 선배의 말을 귀동냥삼아 검색 회사쪽으로 마음을 돌이켜 볼 생각도 있다. 다음이나 NHN을 필두로, 대중적으로 이름난 곳은 아니지만 이쪽 분야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몇 몇 검색회사들 말이다. 어렵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없는것도 아니다. 다음으로 고민중인 것이 공무원이다. 고등학교 선배가 얼마전에 일러준 것이긴 한데 전산 공무원에 한번 지원해 보라는 말이었다. 서울은 좀 힘들지라도 지방은 막연히 어렵진 않을것이고, 오히려 자기 시간도 생기고 형편이 나을거라는 조언이 있었다.

무얼 하든, 3년에서 5년이다. 공무원은 사정이 다르겠지만 웹에이젼시나 검색회사에서 개발자로 들어가나 그 이상은 힘들거다. 그 후론 기획이나 영업이다. 그렇게 버텨도 다시 5년이상은 무리다. 그럼 나이도 30대 후반이다. 그 사이 공부를 계속 할 욕심도 있다. 국문학과 전산의 접목, 이게 목표이긴 하다. 국문학이 컨텐츠가 될 것인데 하이퍼텍스트문학이라도 좋고, 코퍼스도 나쁘지 않다. 그럴바에야 처음부터 검색으로 나가는것이 길이 될 것도 같다. 다만 내가 자바나 파이썬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미천한 것이 약점이다. 시간과 돈을 들인 것에 비해 내 노력이 부족해서였던지 나는 아직도 부족하다.

자신감을 좀더 가질 필요도 있겠고, 자바든 루비든, 파이썬이든 확실히 나를 일으켜 세울만한 기술을 연마해야하지 싶다. 3월부터 5월. 길지도 않다. 3개월, 한자공부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것이고, 자바와 루비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지 싶다. 그리고 NHN과 다음 한글과 컴퓨터에 대한 도전을 준비해야겠다. 1차는 거기다.

2007년 2월 19일 월요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해년 이천칠년도 정말 하루가 지났습니다. 아무리 달력을 한 장 넘겼다고는 해도 설을 보내지 않으면 아직은 새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죠. 이번에도 저는 운이 좋게 휴가를 나왔습니다. 3박 4일의 짧은 휴가여서 미리 약속도 못하고, 급하게 급하게 연락되서 만난 친구가 두어명 뿐이어서 미안한 마음도 들긴 하지만 일,이등병때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을 만나봐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게 없어져서 인지 솔직히 저는 조금 편했답니다.

그래도 마음으로는 항상 보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워 하고, 잘 지내기를 바래봅니다. 올 한 해 부디 건강하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 모두 잘 되기를 바랍니다.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버지의 깃발

원제는 Flags Of Our Fathers 로 우리말로 정확히 의역하면 아버지들의 깃발이겠다. 처음에 '아버지의 깃발'이라고 해서 주인공이 되는 한 명의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원제를 보니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들'이었고, 정확히는 바로 조상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전투를 수행하던 때를 배경으로 우연히 정상에 깃발을 꽂았더 세명의 군인(6명, 3명은 죽음)의 영웅화가 그려지는 영화이다. 전쟁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크게 세가지를 느끼곤 하는데 애국심과 전우애, 그리고 영웅주의가 그것일 것이다. 이 영화는 애국심을 고취시키지도 않았고, 전우애를 강하게 느끼기엔 감동이 없었다.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국이 고질병처럼 사로잡혀 있는 영웅주의였던것 같다. 미국이 만들어내는 미국인이 항상 바라는 '영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사실적인 내용을 통해 고발하면서 꼬집고 있는 셈이었다.

단지 깃발 하나를 꽂았다는 이유만으로 진정 국가와 전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을 대신하여 열렬한 환호와 은그릇 위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는 것은 어쩌면 세 젊은이들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것을 일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스필버그식의 사실적인 전투신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낡은 흑백 사진처럼 녹아드는 드라마를 적절히 섞은 듯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판의 미로

가끔 제목이나 포스터만 보고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있다. 대게의 경우는 너무 재미없거나, 전혀 뜻 밖의 전개로 후회를 하거나이다. 휴가를 나와서 첫 날 할일없는 시간을 채워볼 요량으로 '판의미로'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영화인지도 몰랐다. 왜 소녀가 나와 피를 흘리기 시작하더니, 아니 화면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꼭 메멘토의 장면처럼.

판의미로는 판타지 장르이며, 줄거리는 다소 슬프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요정을 믿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사실 지하왕국의 공주인데 인간으로 환생하여 무식한 의붓아버지(군인)와 착하지만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는 약한(아프거나 죽거나, 임신중이거나) 어머지를 두고 있다. 낮선 곳으로 이사를 했고, 그 곳에서 요정을 발견한다. 요정은 소녀를 신성한 장소로 이끌고, 소녀는 문지기(판)를 만난다. 소녀는 자신이 지하왕국의 공주임을 알게되고, 지하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세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소녀는 판과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지하왕국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판의미로가 나를 특별하게 흔들어 놓은 이유에는 단순히 소녀의 모험담이 아니다. 소녀로 대변되는 판타지 즉 꿈과 군인인 의붓 아버지로 대변되는 현실의 절묘한 대립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슬픔때문이었다. 살육이 난무하는 현실속에서 소녀가 그리는 판타지는 어쩌면 현실 이상의 사실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소녀를 뒤쫒던 의붓 아버지 눈에 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꿈을 잃어버린 현실과 꿈을 가진채 현실에서 도망치는 소녀를 선명하게 대립시켜 보여준 장면이다.

오프닝 컷에서 소녀의 죽음을 미리 보여준 까닭은 어쩌면 감독이 우리에게 '죽음'이 결코 불행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것이 아닐까.

2007년 2월 17일 토요일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이유

"가을날 인적 드문 오솔길 모퉁이에서 만난 코스모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물기라고는 없는 그런 마른 땅에 억지로 피어난 손가락보다 키 낮은 코스모스 한 포기, 단 한 줄기 가지에 단 한 송이의 작은 꽃을 달고 있지. 예쁘지 않아? 당돌함. 치기. 유치. 그런 아름다움. 그 코스모스가 안고 있는 온 우주. 그 우주만한 크기의 슬픔. 아찔함. 잠깐이라는 순간의 쾌락."
- 마리시아스 심'떨림'중에서

2007년 2월 9일 금요일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실망스럽더라구요"
서점에서 처음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을 들었을때 함께 따라왔던 후배가 했던 말이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애써 피해왔던 책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내심 공지영의 여러 소설들을 두서없이 읽어냈던 내 노력에 서운함을 남기지 않으려고 빨간것이 예뻐 보이는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우선 낯설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지영의 초기작 「동트는 새벽」이나 「고등어」,「봉순이 언니」를 최근에야 읽었던 나로서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을 읽었음에도 '사랑'이라는 주제와 '한일문제'라는 사회적인 쟁점, 그녀 답지 않게 해피앤드로 이어지는 결말이 어쩐지 그녀 답지 않음으로 느껴졌던것 같고, 아마도 이것이 후배의 실망감을 내게도 전하는 것 같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로 이미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둔 츠지 히토나리의 제안으로 쓰게 되었다는 이 소설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컨셉트로 두 소설가가 사랑하는 남녀의 입장에서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덕분에 책도 빨간색의 공지영의 것과 파란색의 츠지의 것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아직 빨간책(?)밖에 읽지 못했다.)

공지영이 후기에서도 남겼지만 이 소설을 쓰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한일간의 문제라는게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소설 한 권으로 풀어질 만큼 어설픈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국가간의 묵은 감정을 풀어보고자 했던 노력은 진심어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일본 작가들의 베스트 소설들이 적잖게 보이는데 그것을 그대로 읽어대는 일보다는 그들 작품 속에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녹여낸다면 그것 역시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고, 정말 뜻하지 않은 기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교집합을 마련할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공지영이라는 그 이름만을 두고,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이라는 빨간 책 한 권만을 앞에 두고 몇 자 적어보자면 기대를 가지기엔 그저 이름뿐인 소설이 아니었나 싶었다. 특히 일본에 대한 감정이 개인적인 것에서 국가적인 것으로 확대되는 모습이 조립식 건물마냥 뚝딱 설계되어 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해피앤드로 가는 과정이 지나치게 생략적이지 않나 싶었다.

「철도원」/ 아사다 지로

영화「철도원」과 「파이란」으로 더욱 알려진 일본의 유명 작가의 원작 소설을 시간에 뜸을 들이지 않고 단숨에 읽어버린것은 나의 읽기 습관으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기억속에 「철도원」은 흰 눈으로 뒤덮힌 오래된 역사 앞에서 수기를 들고 서 있는 늙은 역장의 모습이었다. 꽤나 오래된기억이었지만 그 인상은 아직까지도 하얗게 바래어 남아 있는 것을 느끼면 그 장면이 주는 인상이 깊은 것이었던것 같다. 그럼에도책만은 끝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파견중에 들고 갔던 세 권의 책을 모조리 읽고 나서도 시간이 남았던 까닭으로 한 켜에너덜너덜해진 「철도원」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사다 지로, 마흔이 넘은 나이로 문단에 걸어 나와 아름다운 눈물을 짜낼 줄 아는 솜씨 좋은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경험에서이든 상상에서이든 그가 그려낸 풍경은 실제와 같고 또, 꿈 같기도 하다라는 것이 내 느낌이었다. 「철도원」은 일본인이가지고 있는 투철한 직업관과 공사에 대한 분명한 의지력을 눈이 내리는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리움과슬픔의 정서를 끌어올리는 정화작용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러브레터」역시 우리에게 「파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영화의 원작으로 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드러내주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살아 있지 않는 '삶'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진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철도원」에서는 눈이 내리는 풍경으로,「러브레터」에서는  바다가 보이는 풍경으로 그허망함을 쓸어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새의 선물」/ 은희경

어린애 답지 않게 조용조용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 아이들을 흔히 애늙은이라고들 한다.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혼자서 생각하기를 좋아했던 내 어린 시절에도 적잖게 그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었던것도 같다. 하지만 그 나이에 하는 생각이 삶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공상이나 슬픈 상상 따위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진희'의 어린 시절을 통해 바라본 어른들의 이야기. 즉 삶에 대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이 답지 않은 성숙함과 통찰력으로 우물가를 중심으로 모여 사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과 표정들을 스스럼 없이 들어내는 발칙함이 아주 재미나게 읽히는 소설이었다. 중간 중간 정말 아이의 시선일까 싶을정도로 어른의 사고 이상(전지적)을 느끼게 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어디까지나 12살의 귀엽기만 할 그 나이에 '성장이 멈추어 버린'한 인간의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은 뒤에 「마지막 춤의 나와 함께」에 다시 한번 모습을 보이는 '진희'와 전혀 다르지 않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살면서 계기가 되는 시절이나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새의 선물」에서는 열 두살이라는 나이가 그 경계가 되었던 것이고, 나 역시 열 여섯 그 겨울 이후 많은 것이 멈추거나 바뀌어 버린 것을 깨닫게 되는데 아주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특별히 내게는 그 해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한 거리를 한 참이나 끌어 당기지 않았던가 싶다. 그리고 비슷하게나마 나 역시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를 구분짓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