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20일 토요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올해가 2007년이니까 김영하의 문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세상에 존재를 알린지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텍스트는 고대로부터 '사랑'에 이어 가장 많은 담론의 주제가 되었고, 소설의 한 면을 이끄는 마차가 되어 왔었다. 하지만 '자살'을 충동질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손에 꼽을 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소설은 두 폭의 '죽음'에 대한 그림과 두 명의 여자의 '자살'을 통해서 '자살 권리론'을 주장하고 있다. 소설은 또한 액자소설양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주인공인 '자살청부업자'는 곧 작중화자이다. 그를 통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두 여인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으며, 또 다른 '자살 희망자'를 찾아 마로니에 공원을 헤메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작가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살 권리론'을 마땅히 여겨 어디선가 자신을 짐짓 바라보는 '자살청부업'을 의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영하는 액자 밖에서 또다른 시선을 둠으로써 '자살청부업'의 부정함을 밝힘과 동시에 현실속에서의 우리들이 서로를 자살로 내몰고 있는 자살청부자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96년에 발표되었고, 99년에 실재로 자살청부업이라는 신종 범죄가 뉴스에 등장하자 소설을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뒤로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크게 몰아친 일도 있었다. 외국의 어떤 사람은 '안락사'장면을 그대로 녹화하여 세상에 알린 적도 있었다. '안락사'는 '자살'의 어두운면을 걷어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편안함과 '스스로 죽을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로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소설속 작중화자는 일종의 '안락사'를 위한, 도움을 주는 도우미와 같은 존재이다. 두 여인으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방황을 거두고 편안해질 것을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자살방법을 소개하고, 확실하게 자살로 이끌고, 뒤 끝 없는 깨끗한 자살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다.

시간은 한참을 더 흘러 10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책이 되었다. 이 소설이 앞으로 50년 백 년을 넘어 한국 문학사에 한 지점에 의미있는 깃발을 꽂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제쳐 두더라도 '자살'이 가지는 우리들의 의식과 인식, 가능성과 현실의 한계를 은밀한 곳으로부터 토해내게 만든 것은 분명 쉽지 않는 일이었고, 대단한 것이리라.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의미로의 자살. 하지만 이 세계에서 자살은 결국 타인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의 다름 아닌 것이라는 진짜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김영하는 일찍부터 알아차렸던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10년이 지난서도 새삼 이 책을 새것처럼 고치지 않고 10년전 가졌던 절망감과 아픔, 그 치기어린 감성을 고스란히 지닌글로써 다시 펴낸 것이 아닐까 싶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 최혜실

우리말로 "이야기하다"가 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흔히 서사구조라는 의미로 새겨지는 이 스토리텔링은 최근 영화나 음악, 만화와 연극, CF 등 거의 모든 문학적 비문학적 영역에서 연구되고 있다.
최혜실은 이 분야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으로 이미 여러권에 걸쳐 스토리텔링의 대중화에 애쓰고 있다.
문고판으로 나온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디자인, 광고, 텔레비전, 만화, 테마파크에서 보이는 스토리텔링의 모형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인터넷 기업들이 사용자 중심의 웹을 외치며 너나 할 것 없이 웹2.0을 앞세워 새로운 서비스들 소개하거나 기존의 것을 변경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알든 모르든 스토리텔링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며칠전 네이버가 네이버 블로그를 '네이버 블로그 시즌 2'라는 새로운 버전으로 오픈했는데 AJAX와 같은 웹2.0 기술을 적극 수렴하여 사용자 편의성을 극대화한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는 사용자 관점. 즉, A씨가 블로그에 접속해서 무엇을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하는지, 하려고 하는지. 했는지를 파악하는데 초점이 있다. 즉, 사용자의 행동과정이 하나의 이야기구조, 즉 서사구조로써 패턴을 형성하면 이를 적극 프로그램화 하여 편의성을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최근 이같은 스토리텔링으로 분석된 현상들이 여기저기서 상품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광고 시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2007년 1월 9일 화요일

「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은희경은 여자소설을 쓰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공지영과 김영하에 이어서 내 눈과 가슴을 부여잡은 작가가 은희경이었다는 점은 특별한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읽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무언가가 끌어 올랐었다. 《상속》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등 세 편의 장편만을 읽다가 이참에 은희경의 등단작 <이중주>와 <타인에게 말걸기>등이 수록되어 있는 첫 산문집 《타인에게 말걸기》를 끌어 안게 되었다.

요즘들어 국내에서도 싱글앨범이 많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왠지 시디는 열댓곡의 같은 목소리의 서로 다른 느낌의 곡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소설가들의 소설집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주로 소설이라 하면 삼백여페이지를 넘거나 조금 모자란 분량으로 한 손에 꼭 쥐여지는 단행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상 우리나라에는 중편이나 단편으로 등단하는 작가가 대부분이고,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소설집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런 소설집은 꼭 시디를 사들고 영 다른 노래들을 듣지만 왠지 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듯이 감동적이기도 하다.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걸기》는 '여자 소설'이다. 여자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시디처럼 1번 트랙부터 8번 트랙까지 같지만 서로 다른 여자들이 나와 자기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은희경 자신의 이야기인듯도 하고, 진심이 투영된 연기된 작중 화자인듯도 하고, 꿈꾸는 이상향인듯도 한 그녀들의 모습들은 아프거나 쓸쓸하거나 사랑스럽다. 은희경의 대표작 《새의 선물》을 아직 읽어내지 못한 이유때문에 무어라 할 순 없지만, 그녀의 초기작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소설집은 은희경이 그려내는 종합선물과도 같지 않나 생각해본다.

2007년 1월 5일 금요일

「빛의 제국」

분단된 조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채 적국의 스파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편의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식상한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헐리웃에서는 '007'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유명한 스파이의 존재. 하지만 우리에겐 '간첩'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더욱 와닿는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안개속을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안개속을 김영하가 새삼 들쑤시기 시작했다.

대개의 깅영하 소설이 그러하듯 이번 작품 역시 쉽사리 결론적인 대답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권선징악이라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메세지라든지 가슴 뭉클한 교훈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아침 07:00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07:00가 되면 끝이 난다. 최인훈과 주인석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작품에서 시간적 배경을 '하루'로 한정하는 기능들이 나타나 있었으나 장편의 분량으로 하룻동안의 이야기를 담는 노력은 결코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인 기영과 아내 마리, 딸 현미를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하루는 서로에게 배타적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는 묘한 갈등관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작품의 기교가 엿보인다.

작품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간첩 '김기영'은 21살때 남한으로 내려와 작전을 수행했으나 10년 전부터 '끈'이 떨어져 완전히 남한 사회에, 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며 가정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늘 아침 갑자치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고, 그 이메일은 그를 '4번 명령'에 의해 북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기영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로써의 자수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없었다. 단 하루동안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첩 이야기는 분단된 조국에서 특수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어렵지 않게 다룰수 있는 줄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김영하는 '북'을 단순히 분단된 조국의 적국으로 묘사하지 않고, '남한'과 다른, 또 다른 세계로 인식하도록 디자인 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객관적인 여러 나라중 하나로 그려내면서 주인공 즉 가정의 남자. 아버지, 남편으로서 아내와 딸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분단된 현실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간첩'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생각보다 멀리 다른 곳에 놓여져 있어 보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하루'라는 짧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공간적 배경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의 전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들(휴대폰, 인터넷 등)을 이질감 없이 작품속에서 녹여내고 있으며, 같은 시간속에서 다시금 분절되어 가는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은 또 하나의 단편들로 느껴질 정도다.

2007년 1월 2일 화요일

구글에서 민중넷 찾기!

국문과 홈페이지를 새롭게 바꿔보고 싶은 욕심이 일은지 한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구글에서의 민중넷 인지도가 어느정도 되는지 알아보려고 다음과 같이 8가지 검색어로 확인을 해봤다.

1. '국어국문학과'로 검색할 경우
54번째로 나옴. / 네이버: 23위

2. '국문과'로 검색할 경우
28번째로 나옴. / 네이버: 62위

3. '국문과 홈페이지'로 검색할 경우
2번째로 나옴.(1,2번째 한양대 국문과 홈페이지) / 네이버: 62위

4. '국어국문학과 홈페이지'로 검색할 경우
5번째로 나옴 / 네이버: 23위

5. '민중의벗'으로 검색할 경우
54번째로 나옴 / 네이버: 검색결과 없음

6. '민중의벗 국어국문'으로 검색할 경우
2번째로 나옴 / 네이버: 검색결과 없음

7. '국문인'으로 검색할 경우
8번째로 나옴 / 네이버: 검색결과 없음

8. '국문인 사랑합니다'로 검색할 경우
1번째로 나옴 / 네이버: 검색결과 없음



일단 '민중의벗 국어국문'이나 '국문인 사랑합니다'는 우리과 모토와 구호이기 때문에 정확성이 높아진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네이버의 경우는 이를 단 하나도 검색해내지 못했다. 이 조사가 구글과 네이버의 검색능력을 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유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겠다.
그리고 '국어국문학과'로 검색했을 때 54위로 검색되었는데 네이버의 경우는 23위에 랭크되었다. 이는 네이버가 사이트만을 골라내어 나타내준 결과때문으로 전체 검색결과로 놓고 보면 그다지 상위 랭크라고는 볼 수 없겠다. 특이할만한 점은 국문과 홈페이지 자체를 검색하도록 '국문과 홈페이지'로 검색했을 때 민중넷이 한양대 국문과 홈페이지에 이어 두번째로 랭크되었다는 점이다. 네이버가 62번째로 민중넷을 보여준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또한, 국어국문학과로 검색했을때 네이버는 23번째로 보여주던것을 '홈페이지'라는 구체적인 키워드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62번째로 보여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렇지만 국내 최대의 검색엔진인 네이버가 한신대 국문과 홈페이지 민중넷으 저정도로 낮게 랭크하고 있다는 점은 단순히 학교의 인지도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민중넷 자체적으로 보여주만한 컨텐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둘째로, 홈페이지 개설만 했을 뿐 신입생들이나 기타 손님들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점. 셋째로 재학생들 스스로도 학과 홈페이지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점. 넷째로 네이버 자체의 지나친 상업주의 검색시스템 등이 있겠다.

국문학에 관심을 보이거나, 국문과 진학을 고민하는 입시생들에게 검색결과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당장에 검색 대상이 되는 국문과의 이미지나 인지도도 그렇지만 해당 학교의 인지도 역시 적잖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검색결과에서 상위에 랭크될수록 '한신대 국문과'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질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는 좀 더 우수한 인재를 모을 수 있는 길인 동시에 학교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단순히 학과 소개를 하는데 그쳤던 몇년전의 민중넷이 앞으로는 보다 양질의 컨텐츠와 재학생들의 활발한 커뮤니티로 살아있는 홈페이지를 만들어야 할 이유를 찾은것 같다.

주요 검색엔진 개발사들

국어국문학과 정보시스템공학을 전공하고, 웹에이젼시에서 약 2년간의 프로젝트 경험
이제 앞으로 6개월 뒤면 전역과 동시에 취직을 해야 하는데 웹에이젼시냐 검색엔진이냐를 두고 요즘 고민중이다.
두개 전공을 두루 살리자면 두말할 나위 없이 검색엔진에서 정력을 쏟아야 할것같은데
쉽게 말해 홈페이지 만드는 재미. 지금은 코딩만 죽어라 하는 신세지만 훗날 기획자로 커가고 싶은 욕심도 있으니까... 검색엔진에서는 아무래도 국문학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대학다니면서 국어국문학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닌지라... 어쨌든 오늘 아는 형이 아래 국내의 주요 검색엔진 회사들을 소개시켜주셨다. 한번 고려해 보라고.. 아. 고맙습니다 ㅠ ㅠ

http://www.wisenut.co.kr/

http://www.diquest.com/
http://www.openbase.co.kr/
http://www.3soft.com/

2007년 1월 1일 월요일

디지털 문학 공동체

문학을 디지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수고스럽다는 점에서 오래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글과 책은 인류가 소유한 가치중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글이 가지는 쉬움(디지털로의 변환)때문에 가장 먼저 디지털 작업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이 가지는 매체적 영향력이 아직은 유효하므로 책(문학)은 완벽하게 디지털화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인류는 끊임없이 책의 디지털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웹을 통해서 서서히 그 결말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가 되어 가고 있는 시점이다.

당장에 이 글 역시 웹에서 '블로그'라는 매체적 시스템 속에 기록되고 있다.  책이나 종이가 아닌 상태로 작성되고 보존되고 배포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그'는 기존의 여타 홈페이지나 미니홈피 게시판과는 구조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블로그는 마치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여 세상에 공개하듯, 쓰기와 공개(배포)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그래서 소설가나 시인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도 작가로서의 길(등단)이 확장되어 열리게 되는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이미 유명 블로거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 출판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착각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몇해전만 해도 PC통신의 동호회나 인터넷의 여러 게시판을 통해서 창작된 아마추어 소설들이 '인터넷 소설'이라는 신 장르로 포장되어 속속 서점가에 등장했었다. 그것의 문학적 위치나 진정성 따위를 따지기 이전에 일단은 기존의 문단이 형성해 온 등단의 길이 온라인을 통해 확장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여기에 [각주]스템의 구조적 변경을 통해서 사용자 중심의 웹을 구현하고, 무한정의 다수를 포섭하여 수익을 창출해내는 경제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웹의 진화 상태.[/각주]웹2.0 가치에 어울릴만한 '블로그 등단'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춘문예나 이상문학상등과 같이 이미 그 위치나 지휘가 충분한 앞선 시대의 등단문이 건재하지만, 대다수의 개인에게는 다가서기 힘든 길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블로그는 누구라도 개설할 수 있으며, 누구라도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 행동(포스팅)은 가능하다. 누구에게 강요된 것도 아니며, 스스로 등단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창작적 욕구와 분출을 통해서 이끌어 낸 블로깅이 [각주]온라인상의 타인, 블로거[/각주]보이지 않는 손에 [각주]낚이다. 타인에 의해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콘텐츠가 공개되거나 유명해지는 현상을 나타내는 통신은어.[/각주]낚여 어느날 갑자기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양상은 전문적이거나, 유행을 타는 것이나, 재미를 추구하는 것 등  극히 일부에 치우쳐져 있다. 이는 마치 연예매니지먼트사에서 길거리에서 예쁘고 잘생긴 일반인을 캐스팅하는 것과 비슷하다. 공식적이거나 이에 준하는 형태 또는 공공의 장소가 없다.

메타블로그라는 것이 있다. 수 많은 블로그들을 개인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원하는 내용을 취득하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난 시스템이다. 즉, 메타블로그에서 공통의 블로그들을 카테고리별로 묶어서 보여줌으로써 개개인에게 좀 더 편리하게 블로깅이 가능하도록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종합적으로 카테고리를 형성하는 메타블로그도 있고, 특화된 형태로도 존재한다. 이에 어울리게 문학만을 다루는 메타블로그가 있어야 하겠고 그것의 성격은 단순히 카테고리를 특화시킨 형태로 만족해서는 안되겠다. 문예진흥청에서 기획하고 제작하여 운영중인 문장[각주]http://www.munjang.or.kr/[/각주]은 이에 가장 근접한 시스템을 구현하고 있다. 하지만 파이님의 "타 계정의 블로거들을 집약시키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처럼 아직은 문장내 블로그만을 통합하고 있어 자칫 네이버다음과 같이 폐쇄적인 형태로 자체 컨텐츠 확충만 고민할게 될 우려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 메타블로그는 첫째로, 다양한 블로그에서 문학(창작)물을 피드한다. 둘째, 피드된 문학을 자동으로 재 분류하여 소설과 시 등으로 정리한다. 셋째, 블로거들 간에 서로 평가(트렉백)를 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넷째, 전문가 집단에 의한 비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후보로 올리거나) 다섯째,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공식적인 배포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붙는다. 어느것이든 창작되는 것들에는 반드시 저작자가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는 저작권이라는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저작권은 인터넷 안에서 공유라는 철학과 부딪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이 시스템 안에서는 공개와 공유가 원칙적으로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따라서 하나의 포스트(글)가 또 다른 포스트와 연결되거나(연작 또는 또다른 장편의 글이 될 수 있다) 변형(이본의 발생) 전파(온라인 구비문학의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서로 다른 포스트간의 다양한 연결(링크)가 성립되어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형태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검색으로 세상을 바꾼 구글 스토리」/ 존 바텔

책을 읽다보면 종종 신세계가 펼쳐지는듯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책들이나 해리포터류의 판타지 문학을 접할때가 그렇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이기는 해도 구글이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신화를 접하게 되면 환상은 감당이 되지 않을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하는것 같다.

최근 웹2.0과 같은 거의 모든 기사와 책에서 구글을 다루지 않는 곳이 없다. 마치 구글이 웹2.0의 시작이며 전부인양 구글을 찬양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구글이 웹2.0 자체이지는 않다. 아울러 구글이 그 모든것을 설명해 줄 수도 없다. 저자는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웹2.0이라는 "붐"에 휩쓸리기보다는 "구글"자체와 구글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검색"기술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많은 엔지니어와 업계 관련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경험을 보태어 정말 어려운 책 한 권을 만들었지 않나 싶다.

구글의 진화가 지금 이순간도 계속되고 있으며 구글의 똑똑한 두 창립자는 오늘밤도 새로운 돌파구를 위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존 바텔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으며 나름의 선견지명으로 구글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웹2.0과 관련한 몇 권의 책을 읽었거나 기사등을 접했다면 이 순간 이 책을 추천해본다.


ps. 이 책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준 친구 선웅이에게 고맙다는 말 꼭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