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9일 수요일

첫 눈 내린 날

입대 2년차. 2006년. 기상청 관측 결과로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들 눈에는 지금 흰 눈이 쌓이고 있다. 그것도 첫 눈이-

2006년 11월 27일 월요일

「다음은 싸이월드를 넘어섰을까?」/ 김철수

나라는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종종 도서관 골방에서 대대 홈페이지를 들쑤시고 있는 모습을 본 일이 있을것이다. 그러고보니 대대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영자씨(운영자를 부르는 은어)가 되어 버린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보안일일결산이며, 전투일일결산, 사이버교육상황실, 온도지수와 체감온도, 위병소 관리 시스템까지 하나 둘 살덩어리들을 붙이다 보니 어느덧 버전도 (우습지만) 2.0이 되어버렸다. 2.0이라는 의미.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고, 다시 크게 변화를 가졌을 때 나름 자신있게 바꿀 수 있는 숫자였다. 조금 고친게 아니라 모양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기능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라고 자랑하면서 내 걸은 숫자인 것이다.

요즘 웹2.0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물론 사회에서!) 들려온다. 한 달여 전에 김중태씨의 웹2.0과 관련한 책 한 권을 소개한바 있는데 이번에 읽은 김철수님의 「다음은 싸이월드를 넘어섰을까?」는 시기적으로는 웹2.0이 이만큼 주의를 끌기 직전이고, 내용도 기획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편이다. 쉽게 말해 약간 뒤쳐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대충 볼만한 책은 절대 아닌것 같다. 온고지신이라고 아무리 새것이 좋고 새것이 판치는 온라인이라 할지라도 토대가 오프라인으로부였으며, 애시당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논리이다. 1~2년 전쯤의 시선으로 되돌아가 다음과 싸이월드를 둘러싼 국내 웹 경향과 기획에 대한 김철수님의 칼럼을 읽다보면 현재의 온라인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앞으로 웹2.0을 토대로 어떻게 변해갈지도 가는 눈으로 슬피 살펴 볼 수 있을법도 할 것 같다.

그리고 특히 내게는 이 책이 적잖은 도움과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장래의 내 꿈이 웹기획에 어느정도 다가가 있음이 그 때문이었다. 전산을 공부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내게 기획이라는 분야는 달콤한 사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워낙에 무지하고, 빈약한 지식머리 때문에 희망을 품기엔 한 숨이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참에 이 책을 접하면서 조금은 방향제시를 해 볼 수 있지 않았나 한다. 웹 기획에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봄을 추천해 본다.

ps/ 책을 빌려주신 본부포대 차은상 병장님께 감사드립니다.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마이너리그」/ 은희경

386세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60년을 전후로 태어나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광주를 보고, 반공을 배우고, 민주화를 외친 사람들. 그리고 90년대의 노동운동을 지나 밀레니엄의 신세대에게 밀려나 이 시대의 주역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작가 은희경도 그 틈에서 자라나 그들과 호흡하고 그렇게 살아온 삶을 가진 사람이어서였을까?
공지영이 그랬듯, 은희경 역시도 자신의 삶 속에 덕지덕지 붙은 역사들을 애써 떨구지 못하고 모질게 글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마이너리그」는 남성화된 화자가 세 명의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마흔을 넘은 삶의 굴곡까지 함께 이어온 역사를 유희적이면서도 쉽게 웃어 넘길수 없는 일침을 놓는 소설이다. 그들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를 살면서, 반공이나 찌라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매를 맞거나 정학을 당해야 했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넥타이 부대에 휩쓸리면서도 그저 시원한 맥주집을 찾아 종로로 함께 걸음을 제촉하는 4인방이었을 뿐이었다. 대통령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첫사랑과 브라질 관광이었다.
성격이 아주 다른 네 명의 어쩔 수 없는 엮임 속에서 시대가 가져야 했던 아픔도 그저 남의 얘기처럼, 하지만 그런 그림자 놀이에 더욱 가슴 저리고, 아파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의 역사속에서 그들은 단 한번도 메이져로 살아갈 수 없었다. 「마이너리그」는 그런 마이너리그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들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2006년 11월 17일 금요일

십일월 즈음하여

차라리 겨울이겠거니 싶은 십이월이나 일월은 절기상으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겨울의 끝이겠거니 해서 이월이나 삼월은 아쉽지만 다가올 봄으로 인내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가오는 겨울을 머물거림 없이 마중나서야 하는 십일월이 되면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고 더욱 서글퍼지는 생각에 사무치기 일쑤다. 그건 군대에 있던 밖에 있던 매한가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요 며칠 아침밥을 먹으러 가는 식당길이 새하얗게 젖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즉 가을이 가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떨어지는 가을 낙엽 부서지기 무섭게 찾아드는 추위는 애써 태연한척 하기만은 만만치 않아뵌다.

그렇게 계절이 겹치듯 부대끼며 변해갈때 이런저런 일도 많았던것 같다. 근래들어 부쩍 전역자도 많았고, 새 얼굴도 많아졌다. 그만큼 어수선하기도 하고 들떠 있기도 하고 복잡수선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생활의 작은 변화에 호들갑 떨듯 소란스러움도 있었고, 아주 난리라도 난듯 열을 올린 날들도 있었다. 큰 일을 두고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무심하기도 했고, 어쨌거나 귀찮다는 논리로 못 들은 척 하기도 했던 시간들. 그저 군대라는 곳이 속앓이를 들끓게 하고 내내 소심한 마음들을 키우게 하는 것 같아서 아쉽지만 좁아져가는 계절의 온기속에 맞대 잡은 손 모양으로 생각과 가슴을 키우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국기하강식

동계가 되면서 태극기를 내리는 시각이 18시에서 17시로 앞당겨졌다. 얼마간은 이 바뀜이 어색해서 두어차례 때를 놓쳐 알파 근무자들을 추위에 마냥 떨게 했던 적이 있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제때, 또는 조금 일찍 틀어주는 일을 몇개월째 이어가고 있다.

그저 시간이 되면 근무자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제 내려요."라고 무덤덤하게 던져 놓고는 정훈실로 쪼로록 들어간다. 끈이 떨어져 그저 알맹이만 들고 다니는 손목시계를 꺼네놓고 초를 살피다가 59분이 막 넘어서면 앰프를 작동시킨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손은 타이밍을 기다리듯 마우스를 살짝 움켜 잡는다. 56초, 57초, 58초. 딸깍! 빰-빠-빠- 막사 뒤편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국기 하강식 음악. 하루중 가장 듣기 좋은 방송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좀 재미난 상황이 생겼다. 오랜만에 간부들이 모여 축구를 하게 되었는데 17시가 다 되어가도록 경기는 끝나지 않고 한참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 어쩌나? 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들던 참에 당직사령에게 달려가 한마디로 물었으나 곰곰 생각하던 사령은 원칙대로 틀어도 좋다고 답변해 주었다.

전에도 그저 틀어보았으니 오늘도 무례는 아니겠지 싶었다. 때를 기다려 근무자를 확인하고 정훈실로 돌아와 59분 58초 되는 타이밍에 딸깍거렸고, 방송은 으리으리하게 울려퍼졌다. 어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둥실 띄우고 현관문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전까지도 무아지경으로 뛰던 간부님이며 전우들이 모두 제자리에 곤두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새삼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만약 A매치 경기가 열리는중에 애국가가 울려퍼진다면 우리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상대 선수들이 공을 몰고 우리 골대를 향해 달려오더라도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올릴 수 있을까? 그러다가 골을 먹더라도 국민들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애국가라고 칭찬해 줄 수 있을까?

오랜전에 극장에서까지 애국가를 들어야 했던 말이 떠오르며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2006년 11월 16일 목요일

「호출」/ 김영하

모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을 하고 있는 후배를 지난 휴가때 만난일이 있었다. 후배는 취재차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나를 반가워하자마자 왠 설문지 한 장을 건냈다. 설문지는 서너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쉽고 간단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짧은 토막 기사를 쓰기 위해서 인것 같았다. 질문중 하나가 최근 감상깊게 본 책은 무엇인가였는데 잠시 고심하다가 쓴 것이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였다. 최근에 읽은 것은 아니었으나 최근에 읽은 것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단편적이고, 애로시즘이 가득찬! 공허감이 팽팽하다 못해허탈하게까지 만드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 전략!은 다시 「호출」이라는 소설집을 읽게 만들었다.
<사이에 「랄랄라 하우스」를 읽었지만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 특유의 글쓰기 전략이 묻어나 있는 책은 아니고 김영하 작가 자신의 생활수기를 재미나게 블로그 형식으로 이끈 책이었다.>

「호출」은 「당신의 나무」와 같이 여러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80, 90년대를 오가는 배경과 사랑과 배신 죽음에 대한 모티브가 강하게 깔려있는 것이 「호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섹슈얼리즘이나 애로시즘등에 집착함을 떠나 독자로 하여금 허탈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만의 독특한 전략은 신세대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감히 분석되기 힘든 부분인것도 같다. 파괴적이고, 분해적인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해체주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분출하는 작가는 보기 드믈지 않나 싶다.

2006년 11월 11일 토요일

「축제」/ 이청준

-고아가 된 기분이랄까?
어머니의 상을 끝내고, 장혜림(작중 준섭을 취재하던 기자)이 기분이 어떻느냐고 물었을 때 준섭(작가의 작중 이름)의 대답이었다.
준섭은 어머니를 증인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고 오늘까지 살아오는사이 가장 오랫동안 나를 증명해줄 수 있는 증인 말이다. 그 증인을 잃음으로써 나는 고아가 되어 버린다. 누구도 나를 가장 완벽하게 증명해 줄 수 없는...

아버지의 그리움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게도 이미 10년도 더 되어버린 일이 된 그 날의 장례가 떠올라여서였는지 마지막어머니(작중)의 관 위에 흙이 떨어질 때 내 목이 매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눈 앞에 10년전 아버지의 큼지막한관이 눈 앞에 와 닿았기 때문에...

이청준의 축제는 소설속에서도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 처음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을새삼 소설로 도로 펼쳐낸 것이었다. 사실 그래서 기왕에 읽어가기 시작한 축제라는 소설을 영화와 함께 보고 싶은 생각도들었으나(오래전부터 마음 먹었으나 실천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군대에 있는 몸인지라 개인적으로 비디오를 대여할 길이 막연하여소설만으로 우선은 만족하게 되었다.

이청준의 글은 최근에 「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를 읽고, 거꾸로 「청춘」을 읽게 된 것인데 앞편의 책을 통해서 축제 저작에 대한 여러 단서들이 들어나 있어 축제를 읽음에 있어 한결 수월함이 있을 수 있었다.

앞서의 감정을 밝혔듯이 축제는 실제 저자의 어머니의 삶과 말년의 치매증 그리고 죽음과 장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그 사이 소설적인 허구가 조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접함에 있어 조심해 줄 것은 이청준이 임감독의 부탁에 못 이겨어머니를 소재로 한 마지막 작품인 이 '축제'를 쓰긴 했지만 결코 자신의 효심을 자랑코자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작중 저자 준섭의 눈과 가슴을 통해서 내 아버지를 새삼 그리워하며 마음을 적실수 있었듯, 이 소설을 접하는 사람 누구라도 자식된반성과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새삼 일깨우기를 바랄 것이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기왕에 읽어버린 소설이라면 나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장례 절차라든가 풍경은 여느 장례를 설명하고 있는 책보담 낫지 않나 싶을 정도다.

10년전 내나이 고작 열여섯이었을 때. 내 눈은 며칠째 울어버린 까닭으로 퉁퉁 부어 있었고, 숟가락을 입에 대지 못한것이이삼일째였는데 동네 친척네들 주민들은 다 모여서 어찌나 왁자지껄 노래하며 웃고, 떠드는지 속 없는 어린 가슴이 더 미어져 내렸던경험이 있었다. 이제와서 그것이 다 가는이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준섭마냥 반 고아가 된듯한 그날의 열여섯 나는 여지껏 쓸쓸함을 못 버리고 있는것도 같다.

2006년 11월 3일 금요일

「집단지성」/ 피에르 레비

군대에 와서 꼭 읽어야겠다라고 다집하며 목록표까지 작성했었다. 대략 스무권 남짓의 책이었는데 작심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 세권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 두 권은 절반쯤 읽다가 잠시 덮어둔지 1년째고, 남은 한 권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적으로 적은 페이지 덕분에 끝을 보긴 했다. 하지만 머리속을 텅 비우고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가득한 철학적인 메세지와 전문적인 지식들. 감히 읽으려 했던 내 자신이 벌거숭이처럼 부끄러워졌다.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은 감히 그랬다. 번역상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이 열정적인 프랑스 학자의 논지를 내 머리로는 도저히 관통하기가 어려웠다. 막연히 그려볼 뿐. 텁텁한 아쉬움만 잔득 남아 버렸다. 그래서 감상보다는 왜 읽으려 했는지를 대신 적기로 한다.

우리는 인터넷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감히 "문화"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인터넷은 생활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고, 열매만을 따 먹으려고 하고 있다. 마치 개미떼 처럼. 새로난 과일에만 잔득 모여드는 모습들이 너무 쉽게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미니홈피라는 열매에 온 국민이 달라 붙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터넷을 구성하는 네트워크 즉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집 바닥에 배수로나 난방시설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알아야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절로 난 열매에 목매이는 일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마당이 있다면, 채소나 과일나무를 심어도 보고, 물을 주고, 해충도 제거하면서 때를 기다려 수확해보는 그 즐거움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집단지성」은 인터넷의 본질적인 모습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집단지성'은 곶이곧대로 풀이하자면 공동체적인 지식(정보) 샹산정도가 될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는 가장 크고 중요한 재화가 된다. 하지만 그동안의 인터넷은 소수에 의해 지식이 생산되고 정보고 공유되어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이나 네이버, 싸이월드등 국내의 대형 포털 서비스가 부리는 횡포는 이미 명백한 유죄임이 드러나 있다. 네이버에서 제공하고 있는 지식인 서비스는 공동체에 의한 지식 생산아니냐는 질문을 내던질 수 있겠지만 타사 검색사이에서 절대로 네이버 지식인 정보를 검색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을 보더라도 네이버가 얼마나 독점적으로 지식정보를 소유하고 상업적으로 팔아 먹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수의 사용자들만 일개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집단지성」은 다음처럼 닫혀있지 않으며, 네이버처럼 공유를 막지도 않아야 한다. 함게 만들어낸 정보는 함게 공유가 되어야 하며, 그 가치는 모두에게 큰 것이어야 한다. 이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것이 '위키피디아'다.
'위키피디아'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브레테니커 백과사전'과 견주어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을만큼 훌륭한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위키위키'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었다. '위키위키'는 공동체가 함께 웹문서를 생산하며, 공유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스템으로 작성과 수정 삭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는 지근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으며, 업그래이드 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수원화성'을 검색해보니 최초에 조선시대에 지어진 과학적인 성곽. 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너무 성의 없는 내용에 내가 수정버튼을 눌러 '조선조 정조때 지어진 마지막 성곽으로 정양용등 여러 실학자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라고 고쳤다. 그리고 또 다른 사용자가 사진을 첨부했고, 어떤 이는 수원화성을 찾아가는 지도를 넣었다. 어떤 이는 동영상을 넣기도 하고, 어떤이는 수원 화성 부근의 맛집을 추가로 설명해 놓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수원화성'은 정보의 양을 확대해가며, 정확성을 높여간다. 이 작업은 아주 짧은 실시간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누구 한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의 소유가 되고, 모두가 함게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피에르 레비의「집단지성」은 이 같은 인터넷의 미래가 공동체에 의한 창조와 공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나중 조금더 내 머리가 깊어지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봉순이 언니」/ 공지영

재학중이던 때, 그 때도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학과 홈페이지였는데 국문학과였으므로 좋은 책을 추천하는 메뉴도 있었다. 처음 그 콘텐츠를 채우기 시작할 때 마침 MBC-TV에서 느낌표라는 프로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기획 프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프로에서 추천하는 책을 두려움 없이 학과 홈페이지에 반복해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직접 읽거나 개인적인 추천 도서를 싫기도 했지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건 학과 학생들 다수가 느낌표 선정도서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부정적인 관점으로 오히러 선정된 도서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었었다. 의아했다. 책과 가장 밀접한 국문과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선정도서를 마다하다니!
하지만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현상은 아니었고, 일부 교수님들이나 (다른 학교를 포함해서) 지식인들도 느낌표 선정 도서에 부정적인 시각을 적잖게 보이고 있었다. 왜 였을까?

이등병이었을 때. 지금은 전역하고 없는 당번병이었던 지승환 병장이 내 자리를 찾아와 한참동안 캐 물었던 질문이 있다. 책을 고를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나는 것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도 아니고,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도 아니었다. 어떤 기준으로 고르느냐는 질문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나름 일반인들과 다른 기준이나 분류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표였던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뚜렷한 선택 기준이라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감성적으로 와 닿는 책을 고른다면 고를까. 마땅히 알려 드릴만한 기준은 없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대학시절보다 더 많이 독서를 하게되면서(자율적인 독서를 말한 것이다. 과제나 논문 때문에 읽었던 것을 포함하면 대학때가 더 많았지만) 나도 모르게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고, 선택함에 있어서 몇가지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작가중심의 읽기가 시작되었다. 으레 국문학도들이나 다독자들이 이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따라한 것 같긴 하다. 최근에 내가 공지영이나 김영하의 작품을 줄이어 찾아 읽는 것이 그것이다.
한 작가의 생애를 따라(또는 거슬러) 작품을 읽는 것은 과장하여 작가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보는 것과 같다. 작가가 살았던(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대와 경험들, 만남들, 아픔과 사랑, 슬픔과 기쁨들.. 수 많은 사유들. 그것들이 작가의 연대기적 순서와 맞물려 나와 합일되어 가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하면 이 작업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두번째가 자유연상에 의한 읽기다. 마땅한 표현이 없어 '자유연상'이라고 썼는데, 자유연상은 말 그래도 생각이 아무렇게나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간다는 의미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연상되는 다른 책을 곧 이어 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전공 책 읽기에서 버릇이 되어 버렸다. 끝말 잇기를 하듯, 주석을 찾아 읽듯 말이다. 이런 읽기는 내용에 대한 깊이를 더욱 세밀하게 하는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봉순이 언니」의 감상평을 쓸려고 했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지 않나 싶다. 「봉순이 언니」가 대표적인 느낌표 선정도서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당시의 분위기에 휩슬려 당당히 느낌표 선정도서에 선정이 되어 대형서점 진열대를 가득 채웠던 「봉순이 언니」를 의식적으로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와서 내 안에서 정립되어 가는 작가중심이 책읽기를 통해 「봉순이 언니」를 꺼네 읽게 된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에 생각해보니 이런 것이었다. 대학시절 일부 사람들이 느낌표 선정도서를 사양했던 까락은 책을 선정하는데 있어 기준이라는 것은 책을 고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영향력 있는 매체가 쉽사리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느낌표는 엄청난 효과를 거두며 일부 선정도서를 베스트셀러로 올리는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반면에 다른 책들은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읽힐 기회조차 동등하게 갖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을 우려했던 것이었다.

말미에「봉순이 언니」를 읽은 감상을 짧게 적자면, 「봉순이 언니」는 느낌표에서 선정할 만큼 좋은 작품성을 띄고 있었다. 공지영 소설 대게가 그렇듯 자신의 삶을 드러내며 때로는 환상성을 제공하며, 때로는 사실주의에 열중하며 염증나는 세상과 희망적인 감수성을 동시에 자아내고 있다. 자신의 생애 첫사람이었으면서 가장 불행했던 봉순이 언니를 제3자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다섯살 답지 않은 조숙함으로, 즉 내면에 있는 '나'는 30년이 지난 '나'인 동시에 시간은 60년대의 서울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 특유의 희망적인 메세지라고 해야할까? 인간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뷔작 동트는 새벽에서부터 최근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중간에 걸쳐 있는 봉순이 언니에서도 공지영은 나이를 들어가며 포기하는 것도 많지만 여전히 희망이라는 끈을 내려놓지 않고 있어 보인다.

2006년 11월 2일 목요일

사격하기

일년만인가? 일년하고도 반년만인가? 얼마나 지났는지 날짜도 모르겠다.
년말만 되면 남은 탄을 소비하기 위해서 대규모 사격(?)이 실시된다. 덕분에 오늘 하루 무려 90발을 쏴대고 왔다.
훈련소 이후 처음으로 찾은 실거리 사격장, 100미터, 200미터, 250미터마다 표적이 자동으로 올라왔다가 "때"가 되면 죽어주는 센스의 사격장.
아주 오랜만의 사격이었지만 큰 부담이나 긴장은 없었다. 추운지 더운지 짜증스러움이 조금 일어날 뿐이었고,
어서 끝내고 돌아가자라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훈련소에서
사격은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었다. 1등만 하면 집에 전화를 걸게 해주고, 포상휴가까지 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점도 맞추지 못했고, 영내 축소사격장에서 10발(20발중)도 맞추지 못했던 것에 내 목표는 내심 커트라인만 넘기자였다.(12발) 다행인지 운인지 비로 인해 한번의 연기 끝에 다시 찾은 실거리 사격장에서 나는 16발을 맞출수 있었다. 나로써는 너무나 잘 쏜 것이었고, 즐거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1등을 해내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크게 몰려왔고, 집에 전화를 어머니께 전화를 걸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무너져 내려 눈물이 났다.

오늘은 그런 운이나 즐거움은 애시당초 없을 것이었다. 포상은 있었지만 이미 '특등 사수'들이 즐비한 엔트리였다.
나는 아마도 아니 분명 10등으로 턱걸이를 해버린 탓에 오후까지 남아서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오전 30발, 오후 연습 30발, 다시 측정 30발. 모두 90발의 탄 소리가 양 귀를 두들겨 댔다.
아직 결과는 모른다. 다만 포대 1등은 안경이 없어서 힘들겠다던 준호가 되었다. 포상은 확실하겠지.
동시에 '아마도 1등'을 자랑하던 임상병님의 아쉬운 얼굴이 스친다.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천진한 미소를 보이던 황일병도, 근무취침도 못하고 이게 왠 고생이냐며 계속 투덜되던 김상병님도. 모두 아쉬워 할 거다. 내심 1등을 바랬을 테니까.

나 역시. 아주 멋진 운이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PRI 덕분에 온 몸이 아주 뻐근해졌다. 종일 밖에서 바람을 맞고, 바닥을 굴렀더니 먼지냄새가 빠지질 않는다.
탄내까지. 나는 몇 등이나 했을까?

역시나 겨우 10등을 했을까? 어쩜 측정 사격 40명 중 40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