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일 일요일

하이퍼텍스트 갈무리

1 인과율
하이퍼텍스트 구조 속에서 독자는 어떤 경우에도 인과율에 벗어나는 점프(하이퍼)를 할 수 없다. 링크에 반응하는 순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플롯 형식을 무시한 서사구조라 하더라도 인과율에 따르는 서사의 흐름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랜덤하게 이루어지는 하이퍼텍스트는 최소한의 문학적 진정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2 보조기억장치

인간의 기억력은 영원하지 않다. 또한, 단편적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인간은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문자는 인간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였고, 종이와 책은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장치였다. 즉, 인간의 두뇌는 기억을 저장하기보다는 항상 다른 것을 떠올리거나 계산하는 역활에 더욱 몰두한다. 그러기에 두뇌가 아닌 다른 무엇에 이러한 기억들을 따로 저장해 둘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것이 책이었다. 그러나 책은 이제 점점 용량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도서관 가득히 쌓여가는 기억의 파편들. 아무리 아무리 정리를 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봐야 할 책을 어디다가 두었는지를 다시 기록해야하는 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컴퓨터의 발전은 이같은 인간 기억 보존의 한계를 끝없이 확장시켜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바로 컴퓨터 보조기억장치라고 불리우는 디스크의 발명이다. 초기 자기테이프에서부터 현재의 DVD에 이르기까지 디스크 매체의 발전은 눈부신 속도로 변하고 있다. DVD는 대백과사전 한질을 모두 담을 수 있는 CD의 7배에 달하는 용량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인간 기억의 용량을 확장시킨 것이다. 검색 역시 쉽다. 디지털로 저장된 기억의 파편들은 수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저장되어 있고, 빠른 색인과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이처럼 엄청난 기억의 저장소에서 인간의 연상작용과 같은 검색을 원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이 바로 인간의 연상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이를 구현한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노드(페이지, 기억,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치 한명의 사람이 만들어낸 것처럼 서로 얽혀 있다. 링크를 통해 끝없이 쫓아갈 수 있다. 이는 인간 기억이 매 순간 확장과 단절이 반복되는것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3 디지털 문학 복제인가 또 다른 원본인가?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디지털 문학의 하위이거나 그것과 동일하다. 아직 그 개념까지를 정리하기는 내 공부가 부족하다. 하지만 범위의 정도를 단정하지 않더라도 디지털로 이루어져 있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과연 복제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원본인가에 대한 논의는 해볼 수 있을것 같다.

4 시간은 수평적인 공간에 위치한다

수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최근의 나비효과까지- 각자의 영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타임머신'효과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이들 영화가 나로 하여금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시간의 수직 수평적 개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다라는 절대불변의 원칙에 따른다. 또한, 360도 원을 그리며 밤낮 돌아가는(회전하는) 시계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시계는 뒤로 돌 줄 모르며, 죽은자가 되살아나지 않는다.(적어도 주술이나 신의 기적이 아닌 이상)그래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수직적인 자리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유로운 이탈과 이동은 이를 깨뜨려버렸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수평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5 반복 연상작용은 선형적 사고로 간다

일상에서의 연상작용은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커피를 마시다가 오래전 애인과의 마주앉은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의 입술은 첫키스의 기날을 떠올리며, 그 날의 설레임은 대학입학때의 흥분으로 이어져 나가기도 한다. 이러한 연상작용은 분명히 비선형적이며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비슷한 매개에 의한 반복적인 연상은 과정이 지속될 수록 선형적으로 나가는 양상으로 바뀌지 않을까? 즉 아까와 같이 커피를 마시면 항상 옛 애인을 떠올리고, 입술은 첫키스를 떠올리게끔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굳어진 연상의 이미지는 좀처럼 변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렇게 정형화된 연상의 이미지는 결국 비선형적 연상 작용이 선형적 이미지 경로를 완성하게끔 하는 과정에 불과하게 만든다.

6 비선형성이란?

비선형성은 하이퍼텍스트 문학을 인쇄문학과 비교하여 가장 구별짓는 요소중의 하나이다. 인쇄문학이 처음-중간-끝의 순차적인 서사구조를 가진다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개별의 텍스트가 순서에 관계 없이 서사경로(또는 독서경로)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을 비선형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바로 비선형성에도 처음-중간-끝의 서사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이같은 선형성을 포함한 상태로 다양한 경로를 유지할 수 있는 서사성을 비선형성이라고 봄이 옳은 것이다. 다만 용어가 이러한 혼란을 주므로, 비선형성보다는 다선형성의 용어 사용이 더 낳다는 생각도 해본다.

7 매체인가? 장르인가?

하이퍼텍스트 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개념의 모호함이다. 그 중 나를 가장 곤욕스럽게 만든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과연 매체인가? 장르인가 하는 문제였다. 매체는 '어떤 작용을 다른 곳으로 전하는 구실을 하는 물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즉, 인쇄문학에서 책은 매체이다. 종이라는 원소 구성 물질로써 우리에게 '어떤 작용-지식, 메세지 등' 전달한다. 최근에 매체로써 가장 각광 받고 있는 것이 CD/DVD 일 것이다. 고용량의 데이터를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밖에도 플래쉬메모리 등 다양하고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매체는 다양한 분류를 통해 TV/라디오와 같은 정보전달매체와 CD/DVD와 같은 저장매체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책은? 책은 기원적으로 정보를 담는 목적이 강했다. 인류의 기록문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유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해 책은 전달매체로의 역활을 더할수 있었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어떠한가? 일단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기술적인 기능을 설명하는 하이퍼텍스트와 물리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인터넷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인터넷은 매체이다. 인터넷은 최초에 연구자들에 의해 정보를 공유하고 분류 저장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 뒤 네트워크의 발달로 정보전달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책과 유사한 발달과정이다. 즉 하이퍼텍스트는 매체로 볼 수 있으며, 이에 응용분야인 하이퍼텍스트 문학 역시 문학만을 다루는 독립된 매체로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 속에 하이퍼소설과 시, 수필 등 다양한 장르가 파생된다고 보는 것이다.

8 우열이 아닌 개성의 차이로 존재한다

"또 예를 들어볼까? 육상 경기에서 달리는 사람마다 칸이 나누어져 있지 않아. 각자의 칸 속에서 속도를 겨루는 것이지. 혼자서 경주하면 트랙이 한 개로 족하지만 복수가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달리기 위해서는 그 공간은 저마다 편차를 가져야 한다 이거야. 나는 이 구성이 미래 사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해. 문명의 역사에는 새 주자가 나올 때마다 테가 하나씩 보태지는 것인데 그렇다고 기왕의 주자가 퇴장하는 건 아니야."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최인훈, p106)에 나오는 말이다. 최인훈이 미래 문화와 문학에 대해서 어떠한 짐작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그는 21세기에 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는 것이 나올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문학이 그것때문에 사라지리라 보지는 않았다. 각각의 분야에서 점점 고도화 될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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